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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일본 최대 건축 프로젝트 동대사와 백제인 주지스님 양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오사카, 나라, 교토 3도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꼽으라면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를 꼽을 사람들이 많다. 동대사라고하면 세계 최대의비로자나불과 고대보물로 가득찬 정창원 등 국보급 보물을 숱하게 간직한 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역사가 유서 깊은 절이다.


특히 동대사 앞에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사슴이 눈에 삼삼하다는 사람도 꽤 있다. 관광버스가 한 무더기의 관광객을 내려놓으면 사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는다. 사슴먹이용 과자 한 봉지를 사면 수십 마리의 사슴들과 사진도 찍고 뿔도 만져 볼 수 있다. 이래저래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나라의 동대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인연이 깊은 곳이다.  


  

                        ▲ 국보 동대사 대불전


《동대사요록, 東大寺要録》에 따르면 동대사의 전신은 금종사(金鐘寺,긴슈지)로 금종사는 서기 733년 백제스님 양변(良弁)이 세운 절이다. 당시 성무왕(聖武天皇)과 광명왕비(光明皇后)는 신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는데 유일한 한 점 혈육이던 왕자 모토이노미코(基皇子)가 생후 11개월 만에 죽자 몹시 상심하였고 이를 계기로 더욱 불심이 깊어졌다. 성무왕은 당시 일본의 60여 곳에 국분사(国分寺)를 지었는데 동대사는 그 총본산(総国分寺)이다.


12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동대사는 창건 때는 호국불교이념 아래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한 절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213대 동대사 주지였던 히라오카(平岡定海) 씨는 동대사가 정치적, 종교적, 미술사학적, 사원경제적측면에서 시대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말한다. 동대사가 없는 나라(奈良)는 불국사가 없는 경주를 상상해도 좋을 만큼 나라에서 빼놓을 수없는 중심사찰이다.


  

                                 ▲ 백제 행기스님이 전심전력으로 만든 비로자나대불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동대사의 첫 주지 스님이 백제스님 양변(良弁, 로벤)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동대사에서는 주지라는 직함대신 별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말하자면 이 자리는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자 호국불교를 주창하던 조정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양변스님은 689년에 태어나 85살 되던 774년 1월 10일에 입적했다. 스님의 인물평에는 ‘동대사 개산(東大寺の開山)’이란 이름이 따라붙는다.


오우미국(近江国) 백제씨(百済氏) 출신인 스님에 대해서는 재미난 설화가 전해진다.스님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밭에다 두고 뽕밭 일을 할 때 였다.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어린아기를 물고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어린 양변을 물고 간 매는 당시 승려의 최고 직책을 맡았던 백제 의연(義淵)승정이 주석하던 동대사 전신의 금종사 절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가버렸다. 그때부터 양변스님은 의연승정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쌓은 뒤 동대사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초대 주지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설화집인《원형석서》를 비롯한 《곤쟈쿠이야기》 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어린 백제 양변스님을 매가 물어다 놓았던 이월당 모습


 이 밖에도 양변스님은 <매가 키운 아이>라는 전설로 여러 지방에 전해지고 있는데 어린 아들을 매에게 빼앗긴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30년을 하루같이 전국을 떠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사 주지 스님이 매가 물어온 아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 꿈에도 그리던 모자상봉을 하게 되는데 이후 양변스님은 각별한 효심으로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효자스님으로도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유명한 인형극인 죠루리(浄瑠璃)의 단골 주제인 죠루리기다유( 浄瑠璃義太夫) 2절에 ‘이월당양변스님의 유래’라는 이름으로 오늘날도 자주 무대에 오를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이월당(二月堂)이란 동대사 안에 있는 작은 가람으로 마당가에는 당시 양변스님을 매가 물어다 걸쳐놓은 삼나무가 있다. 이월당 건물은 일본 국보로 지정 되어 있으며 안에는 단아하면서도 기품있는 양변스님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초상조각(肖像彫刻)으로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양변스님은 스승이던 의연스님의 뒤를 이어 763에 승정(僧正)자리에 올랐다. 당시 쟁쟁하던 고덕대승은 거의 한반도 출신 스님들로 어린 양변스님은 이런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양변스님이 34살 때 동대사 전신인 금종사에 주석 할 때 만난 신라의 고승 심상(審祥)스님은 화염경 강의로 뛰어난 분이다. 직계 스승인 의연스님은 당시 최고직인 승정자리에서 양변스님을 보살폈으며 일본최초의 대승정 자리를 차지한 백제 행기(行基)스님의 동대사 대불건립(大仏建立) 때에도 양변스님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대사에는 입구인 남대문 건물을 비롯하여 동대사대불이 안치되어있는 금당(金堂, 大仏殿)건물, 이월당, 삼월당 건물 그리고 비로자나대불상, 금동팔각등롱(金銅八角燈籠), 종루 등이 국보급 건물이다. 이 밖에도 목조금강역사입상을 비롯한 건조물,회화, 조각 등이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그 숫자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동대사를 일군 백제 스님 양변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또한 동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있는데 동대사 뒤편의 신라신사가 그것이다. 2월당에 오르는 길에 작은 도리이가 있어 자칫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다.


절 안에 신사가 자리하던 풍습은 명치시대 이전에는 흔한 일이었으며 이들 불교와 재래종교는 서로 반목 없이 오랜 세월을 상호 보완하면서 좋은 유대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명치 정부때 신불분리 정책으로 신사와 절은 각각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때 한국계 신사들은 폐쇄일로를 걷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라신사를 둘러보고 그 길로 계단을 오르면 동대사대불을 완성한 백제계 스님 행기사당이 아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일본역사상 행기스님(行基, 교기)만큼 보살행을 온몸으로 실천한 스님도 없을 것이다. 82살로 죽음을 앞둔 그 시각까지 보살행을 실천하다간 자비의 화신이자 부처의 진정한 제자로 일본인들의 가슴에 고마운 스님으로 남아있는 행기스님!


흔히 일본에서 행기스님을 가리켜 사회사업가, 토목기술자란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스님의 진정한 보살행을 간과한 것으로 행기스님의 깊은 속내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한 토목기술자가 아니라 당시 호국불교를 앞세워 귀족화 되어가는 불교 앞에서 무기력한 민중을 달래고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참 보살이었기 때문이다.


  

                        ▲ 살아있는 생보살 백제 행기스님 사당 “행기당”



 행기스님은 백제출신 아버지 고시(高志才智) 씨와 어머니 하치다(蜂田古爾比売)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시(高志) 씨는 백제 왕인박사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는 탄탄한 집안으로 지금의 오사카 사카이현(大阪 堺県)이 본거지이다. 15살에 백제스님 도소(道昭)를 은사로 득도하여 약사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토목기술을 배워 각지에 다리를 설치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집단 거주시설인 후세야(布施屋)를 8곳이나 만들었다.


또한 전국에 도장(道場)을 지어 불경을 배우고 집회를 할 수 있게 했는데 공식적인 곳만 49개소로 밝혀져 있다. 행기스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에서는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스님의 활동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717년 4월 23일의 일로 이른바 승니령(僧尼令)위반을 적용 한 것이다. 많은 농민들이 생업을 버리고 출가함으로써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것을 우려한 조정의 고육책이었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이 시대에 농민들이 부담해야할 조용조(租庸調)의 부담은 컸다.


그러나 조정의 탄압은 오래가지 않아서 풀리게 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성무왕(聖武天皇)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성무왕과 행기스님은 마음이 척척 맞았다. 일본고대에 있어서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사업인 동대사노사나불 조영(東大寺盧舎那仏造立)의 최고 책임자였던 행기스님은 자금 모집에 있어서 “나는 민중에게 돈을 내라고 하지 않는다. 민중이 스스로 돈을 내고 싶도록 만들었을 뿐이다.”는 철학으로 노사나불 완성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이에 성무왕은 행기스님이 78살 때인 645년에 불교계 최고의 지위인 대승정(大僧正)에 임명한다.


일본 불교 사상 대승정은 행기스님이 최초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행기스님이 민중불교구현 정신에서 일탈하여 귀족불교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하게 된다. 오늘날도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는 흔한 일이지만 당시 행기스님이 받은 질투는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 행기스님이 질투를 받은 이야기는 12세기 일본최대설화집인 《곤쟈쿠이야기》 권 11의 2화에 소개되어 있다.


승려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일본 최초의 대승정 자리에 오른 행기스님이지만 그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박했으며 사치를 싫어했다. 《속일본기》에는 ‘때에 이르러 행기를 두고 보살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보살이란 ‘위로는 부처의 정각인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 불교의 이상적 수행자’란 말처럼 행기스님은 민중들로부터 생보살로서 추앙받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높이지 않고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했다.


동대사 안의 행기당을 설명하다가 행기스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일본에서 추앙받는 위대한 스님이다. 동대사를 찾아갔다면 반드시 소박하고 조촐한 행기당 앞에서 백제 행기스님의 검소하고 실천적인 수행자의 삶을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행기당을 뒤로하면 종루가 보이고 그 종루를 다시 뒤로하고 위쪽으로 걷다보면 2월당 건물이 나온다. 바로 동대사 주지스님인 양변이 어린시절 매에게 물려와 이월당 앞 삼나무 앞에 걸렸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양변 스님의 스승인 역시 백제스님 의연이 주석하던 곳이다.


이래저래 동대사는 한국계 스님들이 많이 주석하던 절로 어디를 가나 그 발자취는 느낄 수 있다. 동대사는 일본인 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외국인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절이다. 이러한 절의 초석을 쌓고 초대 주지까지 맡은 백제스님 양변은 우리가 자손만대 자랑해도 좋을 의지의 한국인인 것이다.


    ★찾아 가는 길

*주소 : 奈良県奈良市雑司町406-1(東大寺, 도다이지)

*가는 길: JR나라에키(奈良駅)에서 걸어서 8분 거리, 긴테츠나라에키(近鉄奈良駅)에서 내리면 4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