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교수] 평양은 고려시대 서경(西京)으로 불리고 북방의 요처로서 중시되었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재성(在城)이 축조되어 중성을 형성하고, 938년(태조 21)에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어 외성이 되었다. 성종 때는 대동문(내성 동문) ·경창문(景昌門=서문)·칠성문(내성 북문)·정양문(正陽門=내성남문) 함구문(含毬門=외 성 남문) 보통문(외성북문) 등 6대문을 건설하였다.
▲ 평양성 지도 |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정동향보다는 동남동쪽으로 비켜있는데, 이는 대동간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기 위한 풍수적 배려이며 이것이 곧 한국의 자생적 풍수사상이라는 지적이다.(최창조) 조선 태종 때 창건하여 선조 때 개축한 것이며 조선인공의 국보유물 4호이다. (1호는 평양성), 조선 전기 건축의 특성을 잘 드러낸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층 누각에는 읍호루(挹灝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질펀한 물을 손으로 퍼 올린다는 자못 시적인 표현이다. 인조13년 1635년 관찰사 안윤덕이 지은 현판이다. 칠성문은 내성 북문(서울의 자하문 격)으로 성 안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북두칠성이 북쪽을 나타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문은 평양성 외성에 있는 성문으로 평양의 서대문 격에 해당하는데(내성의 서문은 따로 있었다.) 보통 송객(送客)이라는 문구처럼 손님을 전송하는 곳으로 서북쪽으로 통하는 ·교통 상 주요관문이다. 보통강 주변에 우거진 능수버들 숲, 흔들리는 버들강아지는 갈길 재촉하는 나그네의 풍광으로 평양 8경의 하나였으며, 보통문은 국보유물 2호이다.
문루는 안정되고 균형 잡힌 조선시대 양식인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중 하나이다. 대동문을 젖히고 국보 2호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아랫부분 석축에는 고구려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현무문(玄武門)· 전금문(轉錦門)>
모란봉과 을밀대
모란봉(牡丹峰)은 평양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의 북안에 있는 해발 96m의 나지막한 언덕부근을 말하는데 주봉이 금수산(錦繡山)이다. 중턱에 을밀대(乙密臺)가 있고, 그 위에 정자가 있으니 유명한 사허정(四虛亭)이다. 이 정각은 일반 형식과는 달리 주심(柱心)장여와 주심도리 사이를 띠우고 화반을 끼워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을밀대란 을지문덕의 아들 을밀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란 전설이 있는데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 현판은 호정 노원상(蘆元相)의 글로서 사허정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준 명필이었다. 마주보는 대안에는 능라도(綾羅島)가 있어 강 가운데 가로놓여 있고. 봉우리에는 최승대 봉화가 있다. 명승고적이 있는 유서 깊은 명소이기도 하다.
▲ 을밀대 |
부벽루와 연광정
모란봉 밑 절벽에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원래 이름은 영명루(永明樓)로 393년에 세운 영명사의 부속건물이었다. <부벽루의 달맞이>는 평양 8 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동평양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려 예종 때 문간공 김황원은 부벽부에 올라 “긴섬 끼고 흐르는 강물은 넓고 질펀한데, 강 건너 넓은 동쪽 점찍은 듯 조그만 산 (長成一面溶溶水 大野東頭 點點山)” 이라는 글귀만 짓고 하루 종일 시상을 가다듬었으나 더 잇지 못하고 붓을 꺾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배운 바 있는데 거의 반세기 만에 현장에 접근하고 보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 부벽루 |
대동강과 보통강
평양시내를 늘어진 S자 모양으로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은 총길이 438킬로미터 유역면적 1만 6-7천 평방킬로미터로 압록⋅두만⋅낙동⋅한강에 이은 5대강 중 하나이다. 열수⋅패수⋅왕성강 등으로 불려오다가 고려시대 대동강이라 했는데 여러 물이 모아서 흐르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당연히 보통강은 이보다 적은 강이라는 뜻이 된다.
낭림산맥의 동백산과 소백산에서 사이에서 발원하며 성천에서 순천강과 비류강이 합쳐지고 남쪽에서 남강이 합류하여 Y 자 형을 이룬다. 평양시내로 들어오면서 합장천⋅무진천⋅보통강과 순화천이 합수되고 태극형으로 감돌면서 흐른다. 수심이 깊고 물이 많아 북쪽 공격 사면은 절벽을 이루지만 남쪽 충적 사면은 평야를 이루어 질펀한 평야가 연속되고 멀리 구릉들이 펼쳐지고 있다가 남포 어귀로 흘러든다. 임진왜란 때는 4 차례나 전투가 벌어졌고, 6,25때는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를 넘어 피난을 갔지만 결국엔 돌아오지 못할 이산의 강이 되고 말았다.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더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습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못 올 그 신세여
아~아 아 하~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대동강철교(연합뉴스) |
그러나 평양 체류 중 우리는 공식석상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제목보다는 이제는 “희망의 두만강”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김일성 교시가 있었다는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많은 대동강”도 같은 맥락으로 치부해서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 1차 전투는 1592년 6월 15일 시작되었다. 아군은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을 대동강 너머로 기습하여 초기 기세를 올렸으나 왜군의 대대적 반격이 있자 후퇴하게 되었다. 대동강을 건너 도강하려 했으나 배가 모자라 익사자가 속출하자 왕성탄으로 어지럽게 후퇴하였다. 이를 본 왜군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아군은 성을 내주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1차전은 왜군의 승리로 마감한다.
임란 당시에 배 없이도 건널 만큼 얕은 여울목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사인데, 지금은 서해 남포항 입구에서 하구 둑과 갑문을 설치하여 호수를 이루어 여물목이 생길 까닭이 없다. 두 줄기의 분수기 기운차게 치솟았지만 부영양화 된 강물은 녹조가 심해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준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중 섬과 건널 다리
쑥섬(혁명유적지가 있다)과 곤유도와 두루섬(豆老島: 평양 대동강에서 가장 크다 )과 벽지도 등이 마치 삼겹살처럼 포개져 있다. 이들 3 섬은 3개의 지류에서 합수치는 소용돌이가 둔치(氾濫原)를 형성하여 생긴 섬들이다.(위성지도 참조) 이 원리에 의하면 능라도는 함장천, 양각도는 무진천이 흘러들어 생긴 섬이다. 이들은 대동강을 명승지로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다리를 지나는 중간지점 역할도 겸하게 된다.
▲ 평양 양각도(제너랄 셔만호의 나포지역에 푸에불로호를 전시하고 있다)와 대동교의 GIS 2D 위성 지도 (출처-위키메피아+글쓴이 가공) |
쑥섬 북쪽을 지나는 충성의 다리, 양각섬을 가로 지르는 양각교가 있고 경의선도 여기를 지난다. 능라도 중앙과 하류에는 각각 청류교와 능라교가 통과한다. 이외에도 섬을 지나지 않고 대동강을 가로 지나는 대동교가 있다. 1932년 제일먼저 놓인 다리이다 옥류교와 미림교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리는 섬을 지나지 않는다. 이들 4개를 더하여 평양에는 총 8개의 다리가 있어 주변 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동강은 이런 경치 좋은 강이 아니고 한이 서린 이산의 다리요 한탄의 강이기도 하다.(사진 참조) 옛날 대동강에는 배다리(船橋)가 있어 관서와 관북을 오고 갔다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고 동 평양에서 선교구역이란 이름만 남기고 있다.
** 진용옥
경희대 전파공학과 명예교수,
현 한국방송통신학회장
현 한국미디아_컨텐츠 학술연합 공동의장
현 방통위 자체 정책평가위원장
전 한국어정보학회 회장
전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원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