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對馬島本是我國之地]” 이는 서지학자 이종악 선생이 독도 박물관 앞에 세운 빗돌에 있는 내용이다. 일본 시마네 현은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하는데 이에 당시 마산시 의회는 대응차원에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발한 날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정부 관여행사로 지속하지만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관여하지 않으며 대마도 고유 영토설은 소수 의견에 그치고 있다. 대마도의 양속성[兩屬性]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평화 시에는 한돌곶[한반도]과 왜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대마도는 처음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12세기 송(宗) 씨가 아비루가를 평정 하면서 이후 송 씨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왜국에서 대명으로 임명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양쪽에 다 속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생존과 존립을 위해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한돌곶[突
[우리문화신문=진용옥 교수]1882년 조ㆍ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그 이듬해 음력 4월 7일(양력 5월 13일) 초대 미국 전권공사(全權公使) 푸트(H. Foote)가 인천에 도착하여 13일 조약에 비준(批准)하였다. 1883년 음력 6월에 조선에서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는 답방사를 뜻한다. 이들은 9월 2일 이른 아침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제물포항을 떠난 지 한달 반 만이었다. 9월 18일 오전 11시쯤, 민영익 등 사절단은 뉴욕 5번가 호텔의 대귀빈실에서 아서 백리세천덕[대통령 곧 프레지던트의 음역]를 만나 알현례을 거행했다. 일행은 민영익의 신호에 따라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백리세천덕 [대군주] 알현례[謁見禮] “이런 예[禮]는 임금이나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한다. 그 외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대군주에 올리는 고유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교수] 한국 선비는 평소에 6예를 닦고 수련과 지식을 연마했던 실천 지식인이요 지도 계층이었다. 학문이 다하면 과거를 보아 조정으로 나가 배움을 실천했으며 나라기 위기에 쳐 했을 때 선비들은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저항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의병이 좋은 그 예이다. 남명조식 학파에서는 50명의 의병장을 배출했다. 대한민국의 건국도 따지고 보면 선비도 활동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선비는 무위도식의 한량이나 경제적 무능력자, 고집불통의 원리주의자 등으로 매도되고 왜곡되어 왔다. 일제의 간악한 통치전략으로 선비 도를 매몰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물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문치주의에 치중하여 양반 구도에서 문신 위주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난을 당하자 문신들은 지리멸멸한 모습을 보여주며 실천 없는 명분론에만 집착했고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문신들은 그 자리에 눌러 앉았다. 문신 등이 절의나 충의를 지키다 자기를 희생이나 순교를 하는 경우는 정쟁(당쟁)패배에서만 보여 주었을 뿐이다. 무신선비열전 두 번째 기술한다. ▲ 정무공최진립(崔震立 1568~1636)장군전망(戰亡)터와 지명 유래비 근거기록 -인조 34권, 15년(1637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교수] 평양은 고려시대 서경(西京)으로 불리고 북방의 요처로서 중시되었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재성(在城)이 축조되어 중성을 형성하고, 938년(태조 21)에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어 외성이 되었다. 성종 때는 대동문(내성 동문) 경창문(景昌門=서문)칠성문(내성 북문)정양문(正陽門=내성남문) 함구문(含毬門=외 성 남문) 보통문(외성북문) 등 6대문을 건설하였다. ▲ 평양성 지도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정동향보다는 동남동쪽으로 비켜있는데, 이는 대동간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기 위한 풍수적 배려이며 이것이 곧 한국의 자생적 풍수사상이라는 지적이다.(최창조) 조선 태종 때 창건하여 선조 때 개축한 것이며 조선인공의 국보유물 4호이다. (1호는 평양성), 조선 전기 건축의 특성을 잘 드러낸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층 누각에는 읍호루(挹灝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질펀한 물을 손으로 퍼 올린다는 자못 시적인 표현이다. 인조13년 1635년 관찰사 안윤덕이 지은 현판이다. 칠성문은 내성 북문(서울의 자하문 격)으로 성 안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만들어졌
[그린경제/얼레빗 = 진용옥 교수] 한국어정보학회 회장,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고, 현 한국방송통신학회장인 진용옥 교수. 그는 오랫동안 한국어정보학회 일로 중국과 북녘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다. 그가 남북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전에 써두었던 북녘 땅 7박 8일 체류기(2004.6.11 ~ 6.19)를 연재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융합시킨 최고의 학자 진용옥 교수는 어떤 눈으로 북녘을 바라보았을까? (편집자말) 차례 0001. 인천과 북경공항에서 / 0002. 순안비행장에서 들어오는 길 / 0003. 평양성의 대동문과 보통문 / 0004. 모란봉과 을밀대 / 0005. 부벽루와 연광정 / 0006. 하중섬과 건널다리 / 0007. 대동강과 보통강 / 0008. 조선인공과 통일국호 / 0009. 평양 의열사와 색향의 기녀문학 / 0010. 꽃으로 본 내 나라에는 무슨 꽃이 찍혔는가? / 0011. 도읍풍수와 통일수도 / 0012. 평양종과 에밀레종 / 0013. 셔만호와 푸에블로호 사건 / 0015. 남포의 갑문과 고난의 행군 길 / 0016. 북녘의 구호와 남녘의 펜스광고 / 0017,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이종무 장군의 세계(世系) 장수 이씨는 이알평(李謁平)의 52세손이며,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장천 부원군에 봉해진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고 있다. 책록된 후손들은 장천의 훗날 지명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4대 이을진(李乙珍)이 공민왕 때 정승을 지냈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에 책봉되었다. 이을진의 아들이 이종무이다. 이종무는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두었는데, 아들은 승평, 덕평, 사평, 후평이다. 딸 1명은 정종대왕의 열째아들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의 부인이 되었다. 이종무가 죽은 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안장되면서 이종무의 시호 양후(襄厚)에서 이름을 따서 양후공 파조가 되었다. 후손들은 본래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동에 있는 묘에는 제향을 위해 묘역을 찾는 정도였고 묘역의 관리는 전적으로 묘지기에게 맡겨 두었기 때문에 한 때 장군의 묘소가 잃었다가 문중의 기록을 근거로 가까스로 다시 찾았다 한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대마도 정벌 영웅 이종무 장군의 무덤, 풀이 우거져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이종무의 생애 ▲ 이종무 장군 이종무(李從茂, 1360 ~ 1425) 장군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었고, 만호(萬戶)의 벼슬에 있을 때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왕자의 란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 덕분에 익대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으며(장천군으로 개봉),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419년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그 뒤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를 거쳐 (左參贊) 등을 역임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4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1)찰방제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찰반제도가 있었다. 마관(馬官)우관(郵官)이라고도 불렸다. 고려시대까지도 역의 운영은 역장(驛長)과 역리(驛吏)가 했고 중앙에서 가끔 관리를 파견하여 순시했다. 이런 관리의 종류로는 역순관(驛巡官)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 등이 있었다. 태종 때부터 역참의 일정한 지역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정역(程驛) 찰방이 다시 등장했다.《경국대전》에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23명의 찰방과 18명의 역승(驛丞;종9품)을 두어 총 537역을 관장케 했는데,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을 없애고 전국의 큰 역에 40명의 찰방을 두고 이를 찰방역이라 하였다. 작은 역에는 역장을 두어 찰방이 이를 관장하였는데, 중요한 요소에는 겸(兼)찰방 12명을 두어 찰방의 비행을 감시하게 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명(官員)을 두어,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公用旅行者)에게 숙소제공‧마필공급 등 편리를 도모하는 기관(機關)을 역참이라 하였는데, 약간의 역참(驛站)을 1구(區)로 하여 이를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우역과 파발에서 근대 우편으로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경희대 진용옥 명예 교수가 쓴 것으로 진용옥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얘기 합니다. 봉수와 파발은 현대 정보통신(ICT)의 원형이다. 대동여지도에는 각각 횃불과 원에 사선을 그은 기호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학자료센터에서는 디지털지도를 만들고 현재 위치를 표시하였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위키매피아에서 위경도 정보를 알아내고, 구글위성지도에 빨간 표시를 하여 새로운 21세기 지도를 만들 계획이다. 이 지도에 봉수와 파발망을 통합하고 남북을 아우르면서 현대 인문지리와 자연지리를 통합하여 고산자식 환경지리부도를 완성코자 한다. 진 교수는 이 글을 부산MBC의 남발 프로그램 자문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옛 것을 단순히 따져보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관점에서 썼다고 말합니다, 이제 진용옥 교수의 인문지리와 자연지리를 통합한 새로운 지식에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편집자 주) 00. 들어가며(고산자식 환경지리부도 만든다) 10. 우역과 촬방 제도 20. 교통과 우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