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윤지영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을 모르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지만 백산 (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많다. 올해는 백산 선생이 부산 중구 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한지 100돌을 맞는 해다.
백산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일제의 눈을 피해 무역회산인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돈줄을 대준 분이다. 임시정부가 등불이라면 백산상회는 등불의 심지가 꺼지지 않도록 기름이 되어준 것으로 독립운동을 이야기 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분이다.
▲ 백산 안희제 기념관 앞에서 종손 안경하 (부산광복회 지부장) 씨 뒤에 보이는 건물 지하에 전시관이 있고 지상 부분은 입구다. 삼각형 뒤 건물은 백산 기념관 건물이 아니다
백산 선생은 자금만 지원한 게 아니다. 선생이 중외일보를 발행할 때 백산 선생은 총독부의 눈엣가시였다. 총독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백산의 논조는 총독부의 시정을 비난, 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한 집필을 강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
▲ 설명도 잘 안되어 있는 백산 선생의 유품
▲ 전시관 안은 좁고 전시물 또한 체계적이지 못하다
1931년 6월 종간할 때까지 선생은 중외일보에서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잦은 압수와 정간처분 등 일제의 언론 탄압을 뿌리치고 젊은 기자들과 편집진이 항일 언론투쟁을 지원하였다. “총독부의 하는 일마다 비난하고 조선이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여 민중들이 따르도록 한 자”란 뒤집어 말하면 “독립운동의 선봉자”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산 선생의 기념관은 100년 전 백산상회를 세웠던 부산 광복동에 작은 규모로 세워져 있다. 서울의 백범 기념관에 견준다면 영 행색이 초라하다. 무릇 기념관이 크고 웅대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처럼 낡은 책자나 사진 몇 장 전시하는 정도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 할아버지 백산 선생의 만주 활동 사진을 설명하는 종손 안경하 씨
백범 기념관처럼 교육과 각종 기념공연, 행사 등을 치룰 수 있어야 기념관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백산 기념관은 지하에 전시관이 있고 지상 부분은 단순히 입구로서 길가는 사람이 공중 화장실로 착각 할 지경이다. 더구나 입구에 남녀 화장실 공용 표지판을 달아 놓으니 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거기다가 큰 도로에서 백산기념관으로 들어서는 골목 입구에는 최근 완성한 듯한 육중한 호텔이 들어서있다. 바로 백산기념관 코앞이라 위압감마저 느낀다.
▲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룬 백산 안희제 선생 |
백산 기념관에 들어서면서 하루 속히 백산 선생의 위상을 나타내는 기념관을 볼품 있게 짓고 거기서 백범 기념관 못지않은 교육과, 강연, 기념식 등을 함으로써 백산 선생의 정신을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천년을 두고 흐르는 강물처럼’ 평생 독립운동에 재산과 목숨을 바친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정신을 되새기고 본받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