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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정철 송강과 기생 강아의 사랑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0]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일산지원 재판 갔다가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조그마한 송강마을에 잠시 들렀습니다. 송강마을이라 마을 안에는 송강문학관도 있지요.

   
▲ 송강 정철의 영정

그런데 송강 정철의 고향도 아닌 이곳에 왜 송강마을이 있는 것일까요? 마을 바로 뒤편 산기슭에 송강 정철의 부모 묘가 있는데, 송강은 3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고, 이어서 38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또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고 이곳에 6년간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대사헌으로 있다가 탄핵되었을 때, 4년간 이곳에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송강이 죽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부모님을 따라 이곳에 묻혔었구요. 

마을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는 송강 정철 시비(詩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중에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었다는 훈민가(訓民歌)가 눈에 띕니다. 


   
 

 

   
▲ 송강 정철 시비

아하! 송강이 이런 시조를 지었으니, 자기 자신도 계속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한 것이군요. 훈민가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을 무시하고 한시만 짓던 당시 양반들과 달리 송강은 이렇게 한글 시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비들을 보다 보니 송강의 시비뿐만 아니라 송강의 문하였던 석주 권필이 이곳을 지나면서 쓴 한시(過鄭松江墓有感) 시비도 있습니다. 

낙엽 진 텅 빈 산 빗소리 스산한데
풍류 재상 말없이 여기 누우셨구나
슬퍼라 한 잔 술 권해 올릴 수 없음이여
지난 날 장진주사 이 날을 이름이셨구려 

석주는 동악 이안눌과 함께 당대의 최고 시인으로 손꼽히는 분으로, 단순한 풍류시 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시도 썼기 때문에 오늘날 조선의 양반들을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부르주아로 보는 북한에서도 석주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주는 결국 이런 비판적인 시 때문에 죽게 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지요. 1611(광해 3) 치러진 별시문과에서 임숙영이 왕실 외척의 전횡을 비판하는 대책문(對策文)을 답안으로 제출하여 합격하였었는데, 나중에 이게 문제가 되어 합격이 취소되지요. 그런데 석주가 이 얘기를 듣고 이를 풍자하는 시를 쓴 것입니다.  

宮柳靑靑花亂飛 궁궐의 버들은 푸르고, 푸르른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滿城冠蓋媚春暉 성 안에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을 떠네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서는 모두들 태평세월을 치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그 누가 선비의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오게 하겠는가
(布衣는 벼슬 없는 선비를 비유하는 말, 危言은 바른 말로 의역함) 

한 번 읊어보아도 단번에 아첨만 하는 신하들만 있는 조정(朝廷)을 꼬집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싯귀 중에 궁류(宮柳)도 문제가 되었지요. 이는 단순히 궁궐의 버드나무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도를 부리던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궁류시(宮柳詩)라고 합니다.

게다가 유희분은 궁류가 왕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광해군을 부채질하여, 이에 불같이 화가 난 광해군은 이덕형과 이항복 등의 대신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를 곤장으로 다스린 후 귀양을 보내지요. 혹독하게 곤장을 맞았으니 몸 성히 걸어 나왔겠습니까? 권필은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와 하룻밤 머뭅니다. 이 때 권필은 그를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이 주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가 그만 장독(杖毒)이 도져 귀양도 가지 못하고 죽은 것이지요. 

그리고 석주의 시에 나오는 장진주사는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말하겠군요.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근여"  교 다닐 때 고전 공부하면서 이 장진주사를 흥얼대던 생각이 납니다. 

이제 마을 안으로 들어가봅니다. 그런데 송강문학관은 문이 닫혀 있고, 문고리에는 송강의 작품 몇 개를 출력해놓은 유인물만 매달려 흔들흔들 하고 있을 뿐이네요. 개장 시간이 아닌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아도 실내가 정돈이 되어 있지 않은 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을 열지 않는 모양입니다. 고양시에서는 매년 이곳에서 송강문화제를 연다고 하던데, 그때나 문을 여는 것인가? 

무덤들이 있는 마을 바로 뒤편으로 올라갑니다. 여러 무덤들 중에 제가 찾고자 하는 무덤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바로 송강이 사랑하던 기생 강아(江娥)의 무덤입니다. 사실 저는 기생 강아의 무덤을 보고자 일부러 짬을 내서 이곳에 들른 것입니다. 

 

   
▲ 송강을 사랑했던 강아의 무덤


강아는 송강이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갔을 때 사랑에 빠진 남원 동기(童妓) 자미(紫薇-백일홍)입니다. 송강이 직접 머리를 올려준 기생이라, 송강의 자를 따서 강아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 율곡 이이는 자기를 수청 들러 들어온 기생 유지를, 이제 갓 피어나는 어린 기생을 차마 꺾지 못하겠다고 정신적 사랑만 나누었는데, 송강은 아니군요. 대유학자와 호방한 풍류가의 차이겠지요?
 

강아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비석에는 義妓 江娥 墓라고 쓰여 있군요. 보통 누구 누구의할 때는 어조사 자를 넣는 경우가 많은데, 이 비석에서는 뺐네요. 아무래도 자를 넣으면 강아지묘로 읽히니까, 뺀 것 아닐까요? ^^ 비석 뒷면에는 송강이 자미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詠紫薇花(영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자미야!)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송강이 이런 시를 지었을까요? 이 시는 송강이 1년 후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면서 쓴 시라는데, 시에서 아름다운 자미를 두고 가야 하는 안타까움과 질투심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송강이 사랑한 기생이라지만 남원 기생의 무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강아는 자신의 동정을 바친 남자 송강을 잊지 못했나봅니다. 1591년 송강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가 신성군을 총애하던 선조에게 미움을 사 강계로 귀양간 적이 있는데, 강아는 송강을 만나러 그 먼 강계까지 갔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전하는 얘기가 조금 엇갈립니다. 처음엔 송강을 만났는데,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송강이 복직되어 못 만났다고 하기도 하고, 처음 강계 갔을 때부터 송강이 복직되어 떠나 못 만났다고도 하고... 

그런데 정철이 강계 유배중에는 또 기생 진옥과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시가 있는데, 송강이 자신의 거시기를 살송곳에 비유하고, 진옥이 자신의 거시기를 골풀무에 비유하는 등 야한 시입니다. 야한 시라고 하니까 부쩍 귀가 댕길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 시도 인용해볼까요?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번옥 : 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憾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코나
내게도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섭철 : 정제되지 않는 철) 

어떤 이는 진옥과 강아를 동일 인물로 봅니다. 아니? 청순한 강아가 그 사이 이런 야한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농염한 여인이 되었나요? 글쎄요... 저는 진옥은 강아가 아닌 송강이 강계에서 만난 다른 기생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야사이다보니 정확한 이야기를 알 수 없네요. 

하여튼 강계까지 갔다가 송강을 만나지 못한 강아는 다시 내려가다가 의병장 이량의 권유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유혹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답니다. 이 또한 평양기생 계월향에게도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강아를 더 돋보이게 하려고 계월향 이야기를 강아에게 덧붙인 것 아닐까요? 

정철은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에 죽어 여기 송강마을의 아버지 옆에 묻힙니다. 정철은 죽었지만 강아는 송강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강아가 소심(素心)이란 비구니가 되어 송강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송강의 묘를 떠나지 못합니다. 강아가 어느 때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강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송강 옆에 저렇게 강아를 묻어줍니다. 사람들이 여기다 묻겠다고 하여 되는 것은 아닐 테고, 송강의 문중에서도 강아의 이런 사랑을 알아 이곳에 묻히도록 했겠지요. 

그런데 정작 송강의 무덤은 여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송강의 무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송강의 무덤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여 1665년에 손자 정양이 이장하였다는군요. 후손들은 그곳이 명당이라고 하니 송강의 무덤을 그리로 옮기면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리라 생각하였나? 어쨌든 송강의 후손들은 송강과 송강의 본처만 그리로 모셔가고, 이곳은 님을 잃은 강아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다시 강아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어찌 보면 송강은 강아를 자기가 임지에 가면 만나는 기생 중 하나로밖에 생각 안 할 수도 있었는데, 강아만이 유독 자기의 처녀를 바친 송강을 잊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아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애틋해집니다.  

강아여! 아니 자미여! 400년 후손이 잠시나마 당신을 만나고 떠나갑니다. 발길은 돌아서지만 저의 눈은 자꾸 강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준비하여 강아에게 한 잔 바칠 것을...

   
▲ 송강이 낚시 하던 송강 낚시터 (왼쪽) 안내문

아까 송강마을에서 올라오던 길로 다시 듭니다. 오른쪽으로 길을 계속 올라가면 송강고개입니다. 그리고 송강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공릉천에는 송강보(松江洑)도 있고, 또 근처에는 송강이 울적할 때 낚시를 하던 송강낚시터도 있습니다. 요즈음 지자체에서 이런 좋은 소재를 모른 체 할 리가 없지요. 고양시에서는 이러한 송강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송강누리길을 만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송강누리길을 따라 걸으며 송강과 강아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