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효는 공의 천성이라 사람들이 법으로 삼았네.
효로서 관직을 받고 나라에서 상을 주었네.
사람의 아들 이렇게 해야 이름이 부끄럽지 않으니
공의 이름이야 부끄럼 없어서 내 이렇게 명을 쓴다.
위는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까지 받았던 귀전 박준(朴峻, 1559~1625) 선생의 묘갈문 마지막 부분입니다. 글을 지은 이는 이조판서에 홍문관대제학 벼슬에 있었던 이명한(李明漢)이지요.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한 향교 유림들이 조정에 그 효행을 추천하여 정문((旌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내렸고,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제수 받았습니다.
선생은 아버지 부사공(府使公)이 중풍으로 몸져누우니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고, 어의(御醫)인 허준(許浚)을 모시려 하였으나 감히 얼굴도 볼 수 없었지요. 날마다 새벽닭이 울면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애원하자 허준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약을 지어 주었는데 그 약을 먹고 다소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병이 위중해지자 선생은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소생케 하기도 하였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묘하였습니다. 하루는 산불이 나서 바람을 타고 무덤까지 번지려 하자 몸을 던져 불을 끄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니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이 산소까지 번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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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박준 선생 무덤과 팔각 효행비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산59-1 가막산 백적봉에 선생의 효행을 적은 팔각비(八角碑)와 무덤이 있습니다. 강화옥돌에 이명한이 글을 짓고, 춘추관 교리 이정오(李正吳)의 글씨로 된 효행 팔각비는 온 나라에 두 개밖에 없는 귀한 효행비입니다. 또한 이러한 효행은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 귀전 박준 선생의 효행을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