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선생님을 처음 만난 곳은 대전교도소 15사 상층 37번 방이었답니다. 1986년 겨울, 저는 ‘구미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 중이었어요. ‘비전향’을 선택하고 절망과 죽음을 마주하던 힘겨운 시절이었어요. 그 때 읽은 ≪김창숙≫(한길사, 심산사상연구회 편, 1981)은 약해지고 폭력에 굴복하려는 제게 용기와 힘을 주었지요.
김창숙 선생(1879~1962)은 ‘유림단 사건’과 ‘나석주 의사 폭탄 사건’의 배후로 1927년 6월 14일, 입원 치료 중이던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서 일본 밀정의 신고로 체포, 국내로 압송되었지요.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징역 14년형을 선고 받았지요. 선생님은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하는 일본 형사를 향해 웃으면서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 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쓰셨지요.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 뇌락(磊落,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마셨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당시 저는 안기부의 고문과 폭력 앞에서 굴복한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무척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고문과 협박에 무너져 사랑하는 친구, 선후배들을 조작사건에 연루시키고 안기부에서 시키는 대로 TV 인터뷰를 했거든요. 1980년 5월 도청 앞 분수대에서 도망친 것도 모자라,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에게 굴복하다니! 선생님의 의연한 모습과 나약한 자신이 겹쳐졌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식민지 감옥에서도 꿋꿋하셨지요. 1933년 신임 전옥(典獄, 간수장 · 교도소장) 미야자키(宮崎)가 병사(病舍)를 순시할 때 “모두 일어나 경례하라”고 요구했다지요. 선생님은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한번 까딱한 적이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라며 거부했지요. “7년 세월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으리라 /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하셨구요. 선생님도 악명 높은 대전 교도소에 사셨더군요. 전옥에게 인사하지 않는다고 어렵게 확보한 독서와 집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남보다 힘든 ‘곱징역’을 사셨더라구요. 제가 ≪김창숙≫을 만났던 1986년 대전교도소는 ‘중구금 시설’, ‘미전향 특별사’로 전국 교도소 중 제일 힘들었어요. 선생님처럼 치열하진 않았지만 저도 ‘옥중투쟁’을 이유로 꽁꽁 묶인 채 폐쇄독방에 갇히고, 두들겨 맞으며 고생하던 때였어요. 식민지 전옥에게 굴복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에 ‘동병상련’의 느낌과 ‘따라 배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폭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회유책이지요. 같은 대전 감옥에 있던 안창호와 여운형이 감옥 규칙을 잘 지켜 상장도 타고 가출옥으로 먼저 나갈 때 선생님 마음이 어떠셨을지요? 저도 ‘미전향’을 이유로 교도소 내 최악의 처우를 강제당하고 고생하고, ‘가석방’은 꿈도 꾸지 못하고,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는데 다른 양심수는 모범수라고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 고통과 아픔이 충분히 이해되고 마음 아파왔습니다.
선생님은 일본법정에서, 일본 법률에 따라, 일본 법률론자들의 변호를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재판을 거부 하셨지요. 선생님을 변론하겠다고 설득하러 찾아온 대구 김완섭 변호사에게 말하셨지요.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고. 재판거부 사유를 이보다 더 강력하고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불복종의 정신에 저의 ‘양심 지키기’가 닿아 있어요. ‘살아있는 무덤’인 대전교도소 15사에서 비전향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게 반성한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폭력과 강제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비전향’을 선택하고 마침내 13년 9개월만인 1999년 2월 ‘준법서약서’도 쓰지 않고,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세상 속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데는, 내가 만난 ≪김창숙≫이 있어요. 고문으로 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여 스스로 ‘앉은뱅이 늙은이’ 벽옹(躄翁)이라고 부르셨지요. 그 ‘벽옹’이 있어 ‘비전향’의 의미를 더 구체적이고 새롭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어요. ‘심산’ 아니 ‘벽옹’ 김창숙 선생님! 당신은 제 ‘비전향’ 멘토 중 한분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사회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다지고 넓혀낼 수 있었다면, ‘벽옹’ 선생님 덕분입니다. 감옥에서 ≪김창숙≫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전해드리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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