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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오늘은 93년전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토교에서 정씨(정현숙 애국지사를 말하며 오광선 장군의 부인)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중략) 영걸어머니(정현숙 애국지사)는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열걸 어머니에 정을 쏟고 희영이나(큰따님) 희옥에게(작은 따님) 좀 더 잘해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 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이부자리 등 주로 바느질일을 도왔다.” 이 말은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에 나오는 정현숙 애국지사에 대한 이야기다.

  생존해 계시는 오희옥(88살) 애국지사는 아버지와 중국에서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다고 했는데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만주쪽에 남아 활동하였고 가족들은 임시정부를 따라 상해에서부터 중경에 이르는 노정으로 이동하는 고난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 북만주 흑룡강성에서 바라본 소련땅으로 이 도시 북쪽의 얄롁셰프스크(자유시)에서 참변이 일어났다. (사진 한국근현대사사전 제공)

  오늘은 93년 전인 1921년 자유시참변(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난 날이다. 자유시참변이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가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여 연해주로 이동하였고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 자유시 참변을 몸소 겪은 오광선 장군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했다. 오광선 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어야했다.

  “오광선 장군은 1920년대에 국민회군(國民會軍)의 홍범도, 서로군정서의 이청천, 청산리에서 대승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등이 밀산(密山)에서 만주 독립군을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할 때는 명지휘관으로 조동식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연합군은 노령자유시(露領自由市)로 이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흑하사변(黑河事變)에 봉착하는 일대 수난을 겪었다.” 이는 국가보훈처에서 기록한 오광선 장군의 공훈 기록이다.

  한국근현대사사전의 <자유시참변>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 포로 864,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자유시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자유시참변도 따지고 보면 일제의 악랄한 침략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잊지 못할 사건이며 잊어서도 안되는 날이지만  이 참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