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놀라운 청음 사건
1433년 설날, 경복궁에서는 새해맞이 아악(정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의식용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편경 연주를 다 들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아홉 번째 소리가 음이 약간 높은 듯하구나. 어찌된 일인가? "
이 때 음악 총감독이었던 박연은 깜작 놀라 직접 편경을 살펴보니 아홉 번째 돌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 《세종실록》 <오례의>에 있는 편경 그림(왼쪽), 1433년 음력 1월1일 세종의 지음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박연이 먹물을 말리니 음이 제대로 나왔다. 멀찍이서 연주를 듣고 반음보다 더 섬세한 음을 잡아냈던 세종. 이처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실제로 음악가이자 작곡가였다.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잘 어울리는 악기를 만들고 표준음을 제정하고 실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세종은 음악 재능이 뛰어나 어린 시절 양녕 형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정간보란 악보를 창안하였으며 정간보로 작곡된 세종악보가 세종실록 부록으로 무려 640여 쪽이나 실려 있다.
이렇게 바로잡은 음악을 바탕으로 세종은 음악 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 15세기에 표준음을 정하고 표준 악기를 만드는 것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특권이었으나 세종은 우리식 표준음과 표준 악기를 통해 아악(공식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정비하고 우리식 음악인 신악을 몸소 만들었다. 특히 정간보라는 악보를 만들어 실제 많은 음악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물론 세종의 음악 연구는 박연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박연은 대금을 잘 불었고 음악 이론에도 능했으며 학문 또한 뛰어나 세종의 왕자 시절 글을 가르친 시강원 스승이었다.
표준 악기와 표준음을 세우다
세종 시대 이전에는 악기를 중국에서 수입해다 썼다. 특히 고려시대 때 중국 송나라에서 보내 준 편종을 사용했는데 아주 먼데서 옮겨 와서 그런지 음이 제대로 맞지를 않았다. 더욱이 고려는 몽골 침략으로 나라가 어수선했고 음악가들이 제대로 연주하며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실정이 조선 초기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세종 7년인 1425년에 경기도 남양에서 중국의 경석(맑은 소리가 나는 돌) 못지않은 돌이 발견되어 우리식 편경을 만들 수가 있었다. 남양은 바닷가 고장인데 근처에 낮은 산들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1427년 기록에 보면 경기 수원도호부 남양 사나사라는 절 서쪽 산에서 경석이 난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 돌은 빛이 푸르고 흰 것이 섞이고, 빛깔무늬가 있는데 소리가 음률에 맞았다고 한다.
▲ 국악기 편경,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등이 편성된다. 모두 16음이 나는 편경의 음색은 자연석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함과 특유의 청아한 느낌을 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음악 연주와 이론의 대가였던 박연이 직접 검증해 낸 돌이었다. 이 돌은 석회암과 대리석이 섞인 돌로 맑은 소리가 난다고 하여 경석이라 부른다. 이런 돌을 기역자 형태로 갈아 쇠뿔로 만든 각퇴로 쳐서 연주한다. 왜 기역자 형태로 만들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고 현대 음악전문가들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맑고 청아한 소리의 음계가 아주 정확하다.
돌로 만들었으니 습도나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소리 변형이 없어 조율할 필요가 없기에 표준 악기로 쓰이는 것이다. 2년간의 준비 끝에 1427년에 편경이 완성되었다. 지금과 같은 16개 돌이 아닌 12개 돌로 이루어진 편경이었다.
물론 돌만 가지고 악기가 되지는 않는다. 표준음이 필요했다. 표준음을 잡는데 필요한 잘 영근 곡식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에서 좁쌀보다 큰 기장이 있었다. 이 일은 박연과 세종이 함께 추진했다.
이 때 표준음을 잡는 것은 대나무 통에 곡식을 넣어 잡는 방식이었다. 기장 알 90개를 늘여 놓은 크기의 대나무통에 기장 알 1,200개를 넣어 나는 소리와 3분의 1인 400알을 빼거나 더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열두 소리관을 만들어 표준음을 잡아내 표준 악기인 편경에 적용했다. 오늘날 학자들이 황종음을 복원해 측정해 보니 황종음의 주파수는 278.5Hz로 서양의 ‘도’보다 약간 높았다고 한다. 황종의 1/3 음이 임종, 임종의 길이에 1/3 덧붙인 음이 태주, 태주의 길이에 1/3 줄인 음이 남려이다. 이렇게 하여 12가지 기본음을 만들었다.
이렇게 실제 악기와 소리 연구를 철저히 하여 마침내 1430년에는 <아악보>라는 책까지 펴냈다. 정인지가 대표 저술했는데 그 서문은 이렇게 출발하고 있다.
“음악은 성인의 마음씨를 기르며, 신과 사람을 조화롭게 하며, 하늘과 땅을 자연스럽게 하며, 음양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태평한 지 40년을 내려왔는데도 아직까지 아악(제례음악)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 특별히 생각을 기울이시와 중국의 채원정이 쓴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공부하시면서, 그 법도가 매우 정밀하며 높고 낮은 것이 질서가 있음에 감탄하시와 음률을 제정하실 생각을 가지셨으나, 다만 황종(표준음)을 갑자기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문제를 중대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내 신 등에게 명하시와 옛 음악을 수정하게 하였다.”
세종은 우리식 음악인 신악을 만들면서 1430년 12월 7일에 이렇게 말한다.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우리의 전통 음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나 하례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그 제작이 딱 들어맞음을 얻지 못할 것 같고, 황종의 관으로는 절후의 풍기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세종 12년(1430년) 9월 11일
세종은 음악 연구에 골몰한 나머지 임금이란 신분도 잊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까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계셨다. 신악(향악, 당악, 아악을 융합하여 새로 만든 세종식 음악)의 조정은 모두 임금이 제정하셨는데, 막대기를 짚고 땅을 치는 것으로 음계를 삼아 하루저녁에 제정하셨다.”_ 세종 31년(1449년) 12월 11일
▲ ≪세종악보≫ ‘보태평 희문’(제1행-3행, 세종실록 제138권), ≪훈민정음과 세종악보, 최종민, 역락
절대 지음 사건이 일어난 1433년은 훈민정음 창제 10년 전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세종의 절대음감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벤트성 사건만이 아니다. 음악 연구를 통한 소리 연구가 완벽하게 끝났음을 보여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절대 음계에 대한 자신감으로 사람의 말소리를 연구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실제 음악의 이치를 적용한 절대음계와 같은 소리를 닮은 문자 훈민정음 28자가 1443년 12월 겨울에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또한 표준음을 잡아낸 황종율관은 도량형의 기준이 된다. 황종율관을 바탕으로 황종척을 만들고 그 잣대로 다양한 자가 만들어졌다. 황종율관 2개의 양이 1홉이고 10홉이 1되, 10되가 1말이다. 이러한 도량형을 적용해 9등분의 ‘수표’를 만들어 지금의 청계천에 설치하여 가뭄과 물난리에 대비했다.
음악은 국가의 표준이었고 그것으로 합리적인 소통을 위한 문자가 제정되었고 생활의 표준이 되는 도량형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