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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백정을 껴안은 사무엘 무어 선교사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38]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마포구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구한말 선교의 푸른 꿈을 안고 낯설고 물 설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 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 청춘을 바치다가, 이역의 땅에 몸을 묻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묘원이지요.

얼마 전에 그 선교사 묘원을 돌아보면서, 많은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자기 피와 땀을 바친 것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시 최하위 계층이었던 백정에게도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푼 사무엘 무어(Samuel Forman, Moore, 한국명 모삼열, )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 백정도 사랑한 사무엘 무어(Samuel F.Moore, 1860~1906) 선교사

미국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사무엘은 189232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전도로 지금 소공동 롯데호텔이 들어선 자리에 곤당골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엽니다. 이 학교 학생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 봉출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교사는 봉출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다 죽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박 씨를 문병한 사무엘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 고종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에비슨을 박 씨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에비슨의 정성스러운 치료로 박 씨는 장티푸스에서 회복됩니다. 

왕의 주치의가 천하디 천한 백정을 치료하여 낫게 해주었으니, 박씨의 감격은 어떠했겠습니까? 당연히 박씨는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곤당골 교회를 찾은 백정이 박씨뿐이겠습니까? 사무엘 선교사의 차별 없는 헌신에 감동한 다른 백정들도 곤당골 교회를 찾았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에는 양반들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백정이 교인으로 들어오니 양반 교인들은 사무엘 선교사에게 백정과 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예배당 앞자리에 양반 자리를 따로 마련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고 있는 사무엘이 이런 요구를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아직은 전통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양반들은 1895년 따로 갈라져 나가 홍문섯골 교회에서 예배를 봅니다. 이후 곤당골 교회는 백정교회로 불립니다.

그러나 따로 갈라섰던 양반 교인들도 좀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나봅니다. 그리하여 갈라선지 3년 만인 1898년 곤당골 교회와 홍문섯골 교회는 합하여 중앙교회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중앙교회는 1905년 인사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 승동교회로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묘비(양화진)

한 번 사무엘 선교사에 감화되어 신앙을 얻게 된 박성춘은 이후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1911년에는 장로 안수도 받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보다 3년 후에 장로 안수를 받은 후배장로 이재형은 왕손이라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가장 천한 백정 출신의 선배 장로와 귀하디 귀한 왕손 출신의 후배 장로가 같이 한 교회를 섬길 수 있었다는 것 - 물론 이에 반발한 일부 양반들이 나가서 안동교회를 세우지만 - 이것이야말로 힘없고 천한 백성들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펼친 사무엘 선교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아닐까요? 

한편 박성춘을 살리고 장로가 될 수 있게 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 - 나중에 이름도 아예 서양으로 바꿨습니다 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의대의 전신)에 들어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어,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합니다. 당시 백정 출신에게 교육 받기를 꺼려하는 학생들에게 박서양은 내 몸 속의 오백 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하였다는군요.

그리고 1918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의술로서 독립군을 돕는 활동도 하였답니다. 2008년 연세대 의대 박형우 교수가 박서양의 이런 활동을 발굴하여, 박서양은 뒤늦게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포장도 받았습니다. 

이렇게 천한 백성에게도 차별 없는 사랑을 펼쳤던 사무엘 선교사는 안타깝게도 19064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둡니다. 사무엘 선교사가 비록 좀 더 뜻을 펼칠 수 있는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사무엘 선교사가 세운 승동교회는 그 후 4대 목사 때부터는 한국인 담임목사가 이어지면서 한국인 스스로 역사의 고난길을 헤쳐 나와 오늘의 승동교회에 이릅니다 


   
▲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 김원벽(왼쪽)과 차상진 목사

그리고 1916. 5.경에는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어 3.1 운동 직전인 2. 20.에는 청년면려회장 김원벽을 중심으로 전국 학생 대표들이 승동교회 1층 밀실에 모여 3.1 학생 독립 만세 운동을 숙의하고, 28일 독립선언서 1,500여장을 받아 시내 각지에 배포하였습니다. 또한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김원벽은 일경이 휘두른 칼에 찔려 체포되어 3년여의 옥고를 치룹니다.

청년면려회장 뿐만 아니라 3. 14.에는 차상진 담임목사 등 12명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12인의 장서를 보신각 앞에서 발표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룹니다. 백정도 차별 없이 받아들인 승동교회가 이제는 민족 독립정신의 산실까지 되었군요. 그런가 하면 승동교회는 1940. 4.에 한국신학대학교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한 서양인 선교사의 차별 없는 헌신적인 선교가 이렇게 꽃 피어 난 것에 다시 한 번 사무엘 선교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개화기의 서양 선교사들은 단지 기독교만 전파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술과 교육을 펼쳤으며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서 한 번쯤 시간 내어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찾아 사무엘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을 돌아봄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