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가끔 독립운동사를 읽다보면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훌륭한 인물을 알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최재형 선생도 그런 분입니다.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분입니다. 안의사는 이등박문을 암살하기 전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병을 조직하고 무기를 지원하고 자금을 댄 분이 최재형입니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1907년 왜놈들이 우리나라 군대를 강제해산 하고 난 후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의병들 가운데 많은 의병들이 왜놈들의 탄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는데, 이런 의병들을 불러 모은 분이 최재형 선생이지요. 그런 자금력이 있었기에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임정에서는 최재형을 재무총장에 임명하기도 했었구요.
그럼 최재형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요? 사실 최재형은 함경도 출신으로 노비의 아들이었습니다. 최재형은 1860년대 심한 기근으로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지요. 그러나 연해주로 건너갔다고 당장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재형은 12살에 가출하였는데, 배고픔에 지쳐 잠이 든 최재형을 발견한 사람은 포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선장입니다. 최재형은 이 선장을 따라 배를 타고 6년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면서 러시아어를 익히고 지식을 익히지요.
▲ 최재형 선생 생가(국가보훈처 제공)
최재형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을 때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 건설로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인력의 많은 부분을 한인 이주자들이 댔고 여기에 러시아어에 능통한 최재형이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의 중요 군항으로 발전하면서 최재형은 군납으로 큰돈을 벌었지요. 그리고 그는 이 돈을 독립운동에 바친 것입니다. 최재형이 연해주 한인 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면서, 최재형은 1893년 도헌(군수와 비슷한 자리)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최재형이 일본에게는 눈엣 가시였겠지요? 일본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최재형을 탄압하여 최재형은 사업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한편으론 일본이 최재형은 일본스파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려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구요. 그리고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3.1운동의 바람은 연해주에도 불어와 연해주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또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어 강우규 열사의 폭탄 투척 거사도 생기는 등 독립운동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 독립정신과 국권회복을 드높이는기사가 쓰인 러시아 주재 교민단체 신문 <대동공보>, 최재형 선생이 사장(국가보훈처 제공)
그러나 왜놈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지요. 1920년 일본은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연해주를 침입합니다. 그리고 일본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으로 한인들을 체포하고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른바 4월 참변입니다. 4월 5일 최재형 선생도 왜놈들에 체포되어 취조도 재판도 아무 것도 없이 이틀 후 살해됩니다. 이 때 최재형의 나이 61살.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자산가로 편히 살 수도 있었던 최재형. 그는 이렇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최재형 선생,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오히려 노비로 괄시만 받던 사람입니다. 조국! 조국이 무엇이관데 이런 분이 굳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으로 나선 것일까요? 최재형 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라져간 투사들 중에는 많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평안도와 함경도는 조선 정부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착취만 당하던 땅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땅의 선조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죽음의 길로 거침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