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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50]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한글로 쓰인 비석중 가장 오래된 비석을 보러 갔습니다. 이 비석은 1536(중종 31)에 이문건이 자기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문화재 이름은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입니다.  

원래 이 앞에는 고령 신씨의 묘만 있었고 이윤탁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윤탁의 묘를 이리로 합장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영비(靈碑)라는 제목으로 비석을 세우면서 여기에 한문과 함께 한글도 새긴 것이랍니다.  

조선 시대 묘비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는데, 그럼 이문건은 왜 여기에 한글을 새겼을까요? 한글 비문을 현대어로 하면 이렇습니다.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제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문건은 한문을 모르는 상놈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 한글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 서울 노원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문화재청)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비만 있었는데 지금 한글고비는 비각 안에 곱게 모셔져 있고, 또 예전보다 더 산 쪽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한글고비가 길 가운데까지 툭 튀어나와, 빠르게 달려오던 차량들이 이 때문에 속력을 줄이며 이를 피해가야 했었지요. 

중계동 신시가지 조성을 할 때에 이씨 종중에서 묘 이전 반대를 하여, 다른 곳은 다 반듯하게 시가지가 조성되었는데, 이곳만 툭 튀어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종중과 합의가 되어 뒤로 이전하면서 고비도 이렇게 비각의 보호를 받게 된 모양이네요. 그런데 또 한 소문에서는 종중의 반대도 반대이지만, 한글고비의 경고문 때문에 인부들이 이 비석을 건드리기를 거부하였었다나요? 

안내문을 보니 한글 고비는 보물 제1524호입니다. 1500대의 보물은 처음 봅니다. 번호가 1524번이라는 것은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얘기이겠지요. 원래는 한글고비(한글古碑)”라 하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었는데 다시 보물로 승격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단순한 묘비라고만 생각하다가, 한글로 된 유일한 묘비이며, 조선 중기의 한글 서체를 알 수 있는 자료이고, 다른 한글본이 대개 한문을 언해한 것이 많은데, 이는 처음부터 한글로 쓰인 문장이라는 점 등이 뒤늦게 참작되어 보물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안내문의 설명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윤탁의 묘를 태릉에서 이리로 이장한 이유가 문정왕후 윤씨의 묘를 그곳에 만들기에 이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비는 중종 31년에 세워진 것인데, 중종 때도 아니고 인종을 거쳐 명종 때인 1565년에 죽은 문정왕후의 묘를 만들기 위하여 이장하였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물론 그 때부터 미리 묘자리를 보아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문정왕후는 살아생전 중종의 릉인 정릉 - 선릉 옆의 정릉 - 옆에 자기 묘를 쓰려고 하였었죠. 이를 위하여 문정왕후는 서삼릉에 장경왕후와 함께 영면하고 있는 중종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릉의 원찰(願刹)인 봉은사를 지금의 코엑스 앞으로 옮기는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정릉으로 옮긴 것이지요 


   
▲ 서울 삼성동 중종의 무덤 사적 제199호 정릉(靖陵). 롤로 외로이 묻혀 있다.(문화재청)

그런데 정릉의 자리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이면 불어난 물이 능 앞 재실까지 들어 매번 보토(補土) 비용도 많이 들게 되니 문정왕후는 결국 자기 소원대로 못하고 태릉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물도 물이지만 제 생각에는 보우대사를 중용하여 불교를 장려한 문정왕후가 당시 양반들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 없어 문정왕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문정왕후가 태릉에 묻힌 2년 뒤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태릉 옆의 강릉에 묻혔으니 외로움은 덜하였겠지요? 그렇지만 중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장경왕후와 잘 있는 중종을 억지로 정릉으로 데리고 와, 자신도 그 옆에 못 묻히게 되니 중종만 홀로 외로운 신세가 된 것 아닙니까? 

! ! 연산군을 몰아내고 등극한 중종이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양반들에 의해 옹립되어 실권이 없던 왕인지라 여자 문제에는 복이 없습니다. 중종이 제일 사랑한 부인은 첫째부인 단경왕후 신씨인데, 이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라 신하들이 강제로 단경왕후를 폐위시켰거든요.  

중종은 신 씨를 못 잊어 틈만 나면 궁궐의 높은 누각에 올라 신 씨가 쫓겨 간 인왕산 자락의 옛 처갓집을 쳐다보곤 했답니다. 남몰래 눈물도 흘리지 않았을까요? 이 소식을 들은 신 씨가 자신이 즐겨 입던 치마를 궁궐에서 볼 수 있도록 높은 바위 위에 펼쳐놓아, 지금도 인왕상 봉우리의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하고요. 

이거 안내문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얘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용인에 왜 양반들의 묘가 많은지 아십니까? 예전에 왕릉은 한양 80리 이내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안에 양반들이 묘를 썼다가 어느 날 왕릉을 이곳에 쓰겠다고 결정하면 그 일대의 묘들은 와장창 작살이 납니다. 

그래서 80리 경계를 넘은 곳으로 터가 좋은 곳을 찾다보니 용인이었답니다. 그런데 이곳도 양반들의 묘가 자꾸 들어오다 보니 자리가 모자라 이웃 진천까지 양반들의 사후 주거지가 몰려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천 사람들이 이를 막기 위하여 소문을 퍼트린 것이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生居鎭川 死後龍仁)”이랍니다. 즉 진천은 양택(陽宅)이지 음택(陰宅)이 아니니 묘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여튼 한글고비 얘기한다는 것이 여기까지 흘렀는데, 제 생각에는 문정왕후 때문에 이장하였다는 안내문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어느 것이 정답인지 누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