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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중국의 발해"로 왜곡하고 있는 현장, 발해 동경성을 가다

[만주에서 찾아보는 배달겨레의 혼 5]

[한국문화신문 =  중국 연변 이윤옥 기자]  9월27일 아침 9시, 흑룡강성 목단강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발해 동경성(渤海 東京城)으로 가는 버스는 전날 수분하( 綏芬河, 쑤이펀)로 가던 20인승 승합차 보다는 조금 큰 차였지만 낡고 덜덜 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버스터미널에 걸린 발해 동경성행 (渤海 東京城行)이란 팻말만 보아도 가슴이 울컥한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럴 것이다. 함께 이번 여행을 하는 일본인 도다이쿠코 작가는 나와는 다른 감정일 것으로 기자는 애써 묻지 않았다.

   
▲ 발해궁성터 안의 발해박물관 내부 전시장

 물론 그녀는 20대 처녀시절에 발해터를 둘러 볼 정도로 중국 속의 조선역사에 대해 깊은 애정과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차창 밖은 온통 옥수수 밭이었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이었다. 더러는 고구마도 심어 들판에서는 한창 고구마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또한 담배농사와 파밭도 간간이 이어졌다.

   
▲ 발해궁성터임을 알리는 중국정부의 돌표지석

 목단강에서 발해 동경성 (渤海 東京城) 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옥수수, 고구마, 담배, 파로 이어지는 벌판을 지나자 이제는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논이 나타났다. 곡창지대라는 말을 이런 곳을 일컫는 것이리라. 한국의 유명한 호남지역 곡창지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너른 들판이었다.

   
▲ 궁궐 건물이 들어섰던 자리에는 커다란 기초석이 당시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돌초석이 수십개씩 놓여 있다

 

   
▲ 발해 관련 유적지에는 관리들이 있어 입장료를 받고 있다. 위는 발해궁성터 입장권으로 30위안, 아래는 1300년된 발해석등을 볼 수 있는 흥륭사 입장권 20위안으로 중국의 물가로 치면 비싼 편이다

   
▲ 발해 유적지에서 발굴된 불상
그 들판 가득 추수를 기다리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순간 기자는 발해의 넉넉한 인심을 떠 올렸다. 그랬다. 발해 동경성이 자리한 곳은 능선하나 없는 황금 들녘의 벌판이었던 것이다. 누가 발해가 자리한 땅을 허허벌판 황무지 땅이라 일컬었던가. 분명 발해의 수도 동경성은 황금들녘 한가운데 있었다.

 동경성이 차차 가까워 올수록 고층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동경성 버스터미널에 버스가 멈춰 섰다. 서둘러 내리는데 “한 30년은 되었을 겁니다. 내가 발해 동경성에 찾아 왔을 때는 정말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달라져도 참으로 많이 달라졌네요” 도다이쿠코 작가는 30년 만에 다시 찾은 동경성의 변모에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발해 동경성은 중소도시처럼 느껴졌는데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관공서 건물들도 모두 번듯번듯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 주변을 비롯한 몇몇 곳은 도로공사와 건물 신축공사로 어수선했다. 도시 건물들은 이제 단장을 막 마친 새색시 같았지만 문제는 버스나 택시 등 탈것이 마땅치 않았다. 거리에는 아직 세발자동차가 택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낡고 덜덜거렸다. 발해 유적지란 워낙 광대하고 넓은 터라 우리는 터미널에서 나오자마자 세발 택시를 전세 내어 발해궁성터를 향했다.

  발해 궁성 터로 가는 길도 황금들녘이었다. 발해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궁성을 지었는데 그 넓이는 눈으로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궁궐은 발해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되었겠지만 건물이 들어서있던 주춧돌과 축대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는 망루처럼 보이는 돌축대 위로 올라가 발해궁성터를 바라다보았다. 궁궐터를 다 돌아보려면 하루종일 돌아도 다 못돌만큼 광활했는데 현재 궁궐터에는 백일홍을 심어놓아 알록달록 피어 있는 꽃들로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도다이쿠코 작가가 발해터를 찾았던 30년 전에는 물론 입장료 같은 것은 없었지만 현재 중국 정부는 발해 관련 유적지마다 관리인을 두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중국 화폐단위로는 결코 싸지 않은 금액으로 궁성터 입장료는 1인당 30위안, 흥륭사(興隆寺) 입장료는 20위안 등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될 듯싶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발해 유적지라는 팻말을 세워둔 중국은 궁성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발해박물관을 지어 현재 내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이 완성되면 발해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게 될 것이지만 문제는 중국의 역사 왜곡부분이다. 궁성터 안에 현재 만들어 놓은 작은 규모의 “발해박물관 안내”만 해도 “발해는 당나라 말갈족(지금 만주족의 조상)이 698년에 세운 지방 민족정권으로 당나라 관리 하에 있었던 하나의 변장 주(州)다”라고 해놓고 있다. 이제 대규모 박물관을 세워(건물은 완성 되었고 내부 진열 중) 본격적인 “중국의 발해” 작업을 착착 진행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 “발해는 당나라 말갈족(지금 만주족의 조상)이 698년에 세운 지방 민족정권으로 당나라 관리 하에 있었던 하나의 변장 주(州)다” 라고 써 놓은 발해궁성터 안의 발해박물관 입구 유리에 써놓은 문구

 "105명의 발해 사절이 일본에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발해사신이 입경하는 동안의 편리를 봐주도록 살피고 관사와 도로, 다리 정비를 서둘렀다. 883년 6월 발해사신들이 입경하자 연도변에 나가 맞아들였고 이중 20명을 홍로관으로 모셨다. 이후 14일 동안 헤이안쿄(平安京)에 체류했는데 발해사절을 성대히 대접했다. 천황이 손수 홍로관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당시 발해사절단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이 있어서 일본측 문인들을 초대하여 한시교류회 등을 가졌다."

일본의 《속일본기》를 비롯한 많은 사서(史書) 등에는 유달리 발해에 관한 기술이 많은데 그 어느 곳에도 발해가 중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은 없다. 해동성국이라 일컫던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을 호령하던 나라로 뛰어난 문화 국가였다.

   
▲ 발해동경성(渤海 東京城) 궁터에는 곳곳에 발해유적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작가 도다이쿠코 씨

 

   
▲ 발해 궁성터는 온통 백일홍을 심어 답사자의 눈을 빼앗는다

비록 지금은 그 흔적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러나 발해는 분명코 고구려를 이은 한민족의 나라였다. 너른 발해궁성터를 돌아보면서 한 시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발해인의 웅혼을 느끼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