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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조선시대, 무관은 격구를 잘 해야만 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865]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개국을 찬양하는 노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44장에는 태조 이성계의 놀라운 격구(擊毬) 실력이 노래가사로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용비어천가>에도 나올 만큼 조선시대엔 격구가 귀족운동의 하나였지요. 또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무관이 되려면 과거시험 중 무과(武科)를 보아야 했는데 그 무과시험의 마지막 관문 곧 전시(殿試)의 끝 시험과목이 바로 격구일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격구를 못하면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무관이 될 수도 없었지요. 격구는 말을 타고 펼치는 공놀이의 일종으로 ‘장시(杖匙)’라는 끝이 숟가락처럼 생긴 채로 공을 퍼 담아 골대에 집어넣는 운동입니다.

조선시대 마상무예라 하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역시 말을 타고 달리며 창으로 공격하는 기창(騎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한 사람이 홀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뤄 함께 싸우는 단체전이므로 격구가 다른 무예보다도 전쟁 훈련에 가장 좋은 무예였지요. 격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먼저 한 사람이 일정한 길을 따라 여러가지 자세를 취하며 말을 달려 공을 골대에 넣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팀을 나눠 공을 서로 빼앗아 가며 골문에 넣는 방식이 있었는데 바로 이 방식의 경기형 격구가 전술훈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 정조의 명으로 1794년에 펴낸 병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격구 모습

   
▲ 조기 후기 이여성이 그린 "격구도"

격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몸짓이 있었습니다. 우선 공을 채에 퍼 올리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장시에 담은 뒤에 공이 채에서 떨어지지 않게 크게 채를 휘두르는 광경은 그 자체로 묘기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편 선수를 따돌리며 공을 퍼올리는 박진감 넘치는 모양새는 구경꾼들의 넋을 뺏기에 넉넉한 장면이었지요. 그래서 격구가 펼쳐지는 곳에는 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할 정도로 조선의 으뜸가는 무예운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