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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동경성 궁궐터에서 한중일 옛 역사를 되돌아 보다

[맛 있는 일본이야기 268]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때는 서기 758년, 일본 조정의 관리 오노노타모리(小野田守)는 발해대사로 임명되어 발해땅을 밟는다. 사신의 임무를 다 마친 뒤에는 발해사신 양승경(揚承慶)과 함께 귀국하는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 9월 1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758년이면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중반기이며, 발해(渤海)는 698년에 건국하여 60년이 지날 무렵이다. 일본과 발해사신의 왕래는 발해가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역시 발해를 13차례 방문 할 만큼 교류가 컸다. 비행기로 다니는 지금도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동경성을 가려면 쉽지 않은 데 당시 해상으로 왕래를 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매우 밀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흑룡강성 발해 유적지

예전에《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과 발해의 교류 이야기를 읽으면서 1천여 년 전의 역사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는데 지난 9월 말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또 다시 발해의 건재를 실감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금들판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발해 동경성터는 그 넓이가 얼마인지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광활했다.


바퀴가 세 개뿐인 세발 택시를 전세 내어 발해 터를 다 돌아보는 데만도 한나절이 걸릴 정도였으니 발해란 나라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해동성국이라 일컫던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을 호령하던 나라로 뛰어난 문화 국가였음은 여러 유물 유적에서 입증되고 있다. 현재 끝없는 흑룡강성 발해 동경성 궁궐터 주변에는 궁궐관리소가 형형색색의 백일홍을 심어 꽃밭천지로 꾸며 놓았다.

 

   
▲ 발해 궁성터 백일홍 꽃밭에서

《속일본기》에 보이는 일본의 발해사절단은 보통 100여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 사절단 속에는 상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두 나라가 교역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들어가는 품목은 주로 담비가죽, 불곰가죽, 호랑이가죽과 같은 모피와 조선인삼, 꿀 등이었고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가는 품목은 비단, 면(綿) 등 이었다.

재미난 이야기는 서기 919년 제34회 발해사절 배구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이다. 때는 음력 5월 12일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연회장에 나온 다이고왕의 왕자 시게아키라(重明親王)는 더운 여름날임에도 검은담비 가죽옷을 무려 8벌이나 껴입고 나와 배구 일행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지금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발해 동경성 궁궐터에 피어난 백일홍 꽃밭에서서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