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85년 전인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이경채 선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경채 (1910 ~ 1978) 선생은 광주 출신으로 1924년 광주고보에 진학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실제로 선생은 학교에서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를 당하면서 이에 격분한 학생들과 함께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으로 동맹휴학을 펼치는데 앞장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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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경채 선생과 재판 기사 |
또한 선생은 1928년 광주고보 재학 당시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는 문서를 인쇄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 등에 붙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선생이 퇴학을 당하자 광주고보를 비롯한 이웃 학교 학생들이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의 뜻에서 동맹휴학을 하게 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불을 붙게 됩니다. 그 뒤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으나 임시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1933년 상해로 망명길에 나섭니다.
상해에서는 윤봉길 의거 이후 강제 휴교된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여 동포 자녀 교육에 힘썼으며, 특히 한인 자녀를 위한 교재 편찬에 열정을 쏟았지요. 한편 193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이동해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을 펴내는데 함께 하였으며 1936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항일학생운동과 인재양성에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려 정부는 1991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경채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