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종희 선생은 1890년 4월 19일, 전라도 금구현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정여립사건, 한말 동학 남접의 조직을 비롯하여 금산사를 배경으로 한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과 역사를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나간 선생은 1919년 전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망명 후 1919년 조직되어 일본인 관리 암살 및 관청파괴를 주도한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투신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 처단 거사에 참여한 선생은 1926년 1월에 광주로 이동하여 다른 10여 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留粵)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면서 혁명운동의 열기를 만끽하고 새로운 운동의지를 다져갔다.
▲ 이종희 독립투사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청년 투사 양성 및 조직의 운동역량 강화로 의열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립의 결실이 이루어 졌다.
선생은 1937년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어갔고, 이어 1938년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명의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를 조직에 참여하였다. 1940년 말 일본군과의 직접전에 돌입하면서 조선의용대는 화북지역 이동을 결의하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일대로 이동하였고, 이어 1942년 12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김원봉이 광복군 총사령부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었고 선생은 제1지대장의 소교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1943년 김원봉의 뒤를 이어 제1지대 지대장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어나갔다.
1940년부터 선생이 살았던 중경은 분지 지대로 늘 안개가 끼고 대기가 습해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 중에 폐병을 앓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도 병상에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6년 4월 29일 환국선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나 고국 땅을 밟기 직전 배 안에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환국은 아주 지체되어 어렵게야 이루어졌다. 환국을 도와줄 미국과 중국과의 교섭에, 그리고 교섭이 타결된 뒤에도 교통편 및 여비 마련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였다. 임시정부 요인 29명이 2진으로 나뉘어 1945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에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후, 임시정부 직원과 그 가족 4백명 가량의 환국이 4차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한국독립당 인사들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제1차 환국진은 1946년 1월에 중경을 출발하여 육로와 배편으로 한 달여의 여행 끝에 2월 19일 상해에 도착했고, 석 달여를 기다린 끝에 4월 26일에야 미군 lst 함정에 승선해서 상해를 출발할 수 있었다.
민혁당 계열 인사들과 그 가족 40여 명은 제2차로 환국할 순서였다. 그렇지만 이종희 선생은 병이 깊어 위독한 상태임이 감안되어 제1차 환국진에 포함시켜진 것 같다. 그를 태운 수송선은 4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바로 하선하지 못하고 검역과 상륙수속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음력 3월 28일) 밤, 이종희 선생은 고국 땅을 밟기 직전에 여독이 깊어서였는지 선중에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부인 송단여와 여섯 살 난 아들 병태를 남겨두고 56세를 일기로 작고한 것이다.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의 안타깝고 애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종희의 유해는 고향으로 운구되어 원평 뒷산의 양지바른 묘소에 묻혔다.
1977년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 모악향토문화연구회가 원평리 학수재에 추모비를 세워, 그의 드높은 민족애와 불굴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종희 선생은 200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