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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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나는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인식하고 가슴에 담아 오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역사의 노래’ 애국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연신내 골목 헌책방에서 산 장준하의 《돌베게》라는 책이다. 일제 학병으로 갔다가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준위로 입대하고, 다시 광복군에 참여하다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환국하는 과정을 한숨과 격정으로 단숨에 읽게 한 책이다.
그런데, 김구선생과 환국하는 과정의 애국가 기술 부분에서 눈물지으며 따라 부르다 책장을 적시는 뜨거운 감동을 겪었다. 내 20대와 비교되는 민족사 속의 꿋꿋한 삶을 마주하고 큰 자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암송하는 이 대목! 애국가의 힘과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후 아리랑과 함께 30여년을 매달려오게 하였다. 나에게 ‘애국가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준 대목을 다시 떠올리며, 나의 ‘애국가 찾기’를 시작 하고자 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김구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조선을 지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평가했다는 미군 하지 중장(J. R. Hodge, 1893~ 1963)이 마련한 미군 수송기편으로 단지 ‘임정요인의 한 사람’이란 자격으로 환국 제1진으로 귀국했다. 선생을 수행한 장준하는 비행기 창으로 한반도가 보이자 창가를 향해 감동적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을 기술하였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합창으로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래 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가 되었다.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드디어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기체 안의 노 투사 김구마저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광복과 환국의 감격을 표현해야 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라는 만남을 꿈꾸며 부를 노래가 애국가 말고 또 있겠는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은 물론, 1940년 중경임시정부 광복군 성립식에서도 광복과 환국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가 아니었던가?
▲ 장준하 지은 《돌베게》
김구와 장준하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며 감격으로 애국가를 부른지 70년을 맞았다. 이 땅에서, 이 나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불러왔는가?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 애국가에 대해 역사와 위상과 미래상에 대해 제대로 논의해 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아예 ‘우리는 국가(國歌) 없는 국가(國家)’라고까지 했다. 그런가하며 국가 기관이 ‘작사자가 미상(未詳)’이라고 하니 이를 빌미로 새로 제정하자’는 운동이 벌어졌고, ‘친일파가 작곡자라면 부르지 않겠다.’는 등 논란의 대상으로만 삼아왔다.
과연, 애국가는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이제 나는 30여년의 자료수집 결과와 그간의 논쟁 중심에 섰던 입장을 정리하여 ‘애국가 역사’, ‘애국가 위상’, ‘애국가론’을 정리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반론으로 수용하여 정정의 계기로 삼겠고, 수정과 정정이 옳다면 격려의 손뼉도 쳐주고 싶다. 함께 해주길 바란다.(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