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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옛 서당격인 일본의 “테라코야”

[맛있는 일본이야기 284]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에는 예전에 서당이 있어 아이들의 글공부를 전담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도 서당이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한국의 서당과 같지 않지만 일본에는 “테라코야(寺子屋)”라는 곳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테라코야(寺子屋)는 한자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절집(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유래한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이 글공부를 통해 과거시험을 치러 정계로 나갔지만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 (1192) 이후부터 명치 때까지(1868) 약 670여 년간 무사정권시대이다 보니 차분하게 글공부를 시킬 상황이 되지 못했다.

권력을 장악한 무사들은 자신이 싸워서 쟁탈한 정권을 빼앗기지 않게 늘 방어를 해야 했기에 일본의 670여 년간은 한마디로 사무라이들의 싸움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내전 상태였기에 글공부를 하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붓 대신 칼의 시대였다.

그래도 글줄께나 하던 사람은 절집의 승려들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절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맡아 했는데 여기서 테라코야(寺子屋)가 한국의 서당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일본의 테라코야의 시작을 흔히 중세의 절에서부터 잡고 있지만 사실은 에도시대(1603-1868)에 들어서고 나서 제대로 된 아이들 교육이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쵸닌(町人)이라 부르는 상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들의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 산술, 도덕 같은 교육을 시키고자 테라코야가 번성 했다. 그러나  에도(지금의 도쿄)에서는 테라코야를 수습지남소(手習指南所)라고 불렀고 전통적인 상인이 강세를 보이던 오사카, 교토, 이세 등지에서는 테라코야라 불렀다.



   
▲ (테라코야(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에도시대는 상공업이 발달한 관계로 글의 효용성이 생겨 문서를 읽거나 써야하는 일을 담당 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자 그 수요에 맞춰 테라코야가 우후죽순처럼 늘어갔다. 처음에는 절에서 교육을 맡아 하던 것을 나중에는 개인강습소 형태의 시설이 늘어났다.《일본교육사자료(日本育史資料, 1892)》에 따르면 연간 테라코야는 300 곳이 넘게 생겨났고 일본 전역에서는 16,560곳이나 성업 중이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민간 교육시설인 테라코야의 인기가 컸다.

그 뒤 명치정부에서는 학교제도를 만들어 학생들을 국가의 통솔 하에 두고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작업을 감행했으나 학교시설, 교원이 충족되지 못한 지방에서는 기존의 테라코야를 초등학교 시설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치정부의 교육정책이 진전함에 따라 사설 서당격인 테라코야는 점차 자리를 잃고 오늘날과 같은 학교제도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 과정은 한국의 서당과 같은 운명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