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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1)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5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는 애국가와 태극기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3.1운동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항일시위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총독부는 <애국가>류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바로 191010월 내무부 학무국 명의로 <축제일 약해>를 만들어 태극기나 애국가에 대한 검속을 강조했던 것이다. 


   
▲ 2011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75호. <애국창가>. 이 책에는 무궁화가·애국가 등 70여 편의 애국창가가 수록되었다.

사립학교 중에서는 창가나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독립을 고취하며 일본으로의 반항을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사용을 허락지 않았으므로 취체(取締)상 가장 주의를 요한다.”
 
또한 총독부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모든 교육과정에 학습케 했고, 일장기 게양을 의무화 했다. 이와 함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아침마다 제창케 하고 애국일(愛國日)의 노래’(일본군에 감사하는 황국신민이 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 부르기와 궁성요배(일왕의 황궁을 향해 절 하는 것), 정오의 묵도(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묵념), 신사참배, 가미다나(집안에 놓는 신을 모시는 신단)의 설치, 일어상용, 시국 좌담회 개최 등을 정례화하여 일상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교가나 교명이 민족적인 뜻을 담고 있으면 그것도 폐지시켰다.
 
실례로 <보성전문학교>보성’(普成)이 일본어로는 후세이로 한자음으로는 부정(不正)”이란 뜻이 되어 이를 개명하라고 강요하여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꾸게 한 사실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화’(梨花)가 이왕가(李王家)의 문장(紋章)이므로 민족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트집을 잡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도록 했다. 그런가하면 사립.(私立)이라는 말에 자주의식이 배어 있다는 이유로 쓰지 못하게 했고, 학교 모표(帽標)를 무궁화로 했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게 강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창가(음악)분야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10년에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부곡(附曲) 창가집으로 조선시대의 창가집이기도 한 보통학교 창가집1집에 우리의 전통 민요는 한 가지도 담지 않고 일본 창가 교육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는 음악 교재에서 마저도 민족의식을 말살하려한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창가 집은 1881년에 일본에서 발행한소학창가집가운데서 27곡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당연히 통감부의 관여에 의한 결과였는데, 이것은 다시 명치(明治) 44년에 정정판(訂正版)으로 발행될 때 일부를 바꿔 조선총독부 편으로 내기도 했다. 또한 1914년 총독부가 발행한신편창가집에서는 기미가요 등을 게재하여 본격적으로 학습을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찬송가도 세세히 감찰하였다. 당연히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기준으로 삭제 하거나 사용을 금지시한 것인데, ‘주의군대’(개편찬송가」․381)가 그 한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애국가를 부르도록 그냥 두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애국가를 탄압한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해외 교민사회나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운동 단체에서 국가(國歌)를 대신하여 불리는 상황이었기에 국내에서 더욱 탄압을 했다. 두말 할 여지없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곧 항일, 애국, 독립운동이었다(<선언서 낭독, 애국가 고창>, 조선일보, 1926, 11, 6) 이제 애국가 사건들을 통해 그 탄압상을 확인하기로 한다.
 
 
애국가 사건
 
1924521일자 동아일보애국가 사건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애국가 사건으로 잡힌 로희성(盧熙星. 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삼정목 구십삼 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 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 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 더라.”

   
▲ 1924년 5월 12일 동아일보에 난 "애국가 사건" 기사
 
기사 제목 자체가 애국가 사건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애국가와 관련하여 체포되거나 취조당하는 것 자체를 모두 애국가 사건이라 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런 사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앞선 보도는 확인이 되지 않아 구체적인 배경을 알 수는 없으나 범인의 나이가 30세가 된 것으로 보면 보통학교나 전문학교 학생은 아니다. 또한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조직적인 항일운동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해주형무소 애국가 사건
 
1923년 임시정부의 연락 업무를 갖고 국내에 잠입 했다 체포, 수감된 요원 20여명이 1923410일 임시정부 창립 일을 맞아 옥중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것이 문제가 된 사건이다. 해주 형무소 서흥 분서에 수감된 이들이 임시정부 구립 기념식을 하는 것이 옳다 하고 22명이 일제히 대한애국가(大韓愛國歌)’를 높이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간수들이 이중 세 명을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고 이에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여 나흘이 지나 거의 실신하게 된 사건이다. 그래서 감옥 관리가 빌어 단식을 중단했다.
 
한편 이 자료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 애국가대한애국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대한또는 한국(韓國)’이란 국호를 붙인 것은 그것이 국가의 의미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안도(所安島)의 항일 애국가
 
19275월과 6월 사이 조선일보동아일보에는 완도의 <소안학교 돌연 폐쇄>와 같은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이 기사는 소위 소안도 사건이란 소작쟁의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상을 보여준 것인데, 이는 1919315일에 촉발된 만세운동으로 이어져 1927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105인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양기탁의 영향을 받은 송내호가 주도 한 것이다. 이 소안도사건이란 1921년 토지계장사건, 1926년 살자회 결성, 1927년 소안학교 폐쇄 반대운동 전개, 1928년 송내호 장례 탄압에 대한 집중적인 항일운동의 총칭이다.
 
그런데 이 운동 과정에서 항일투쟁가()가 지속적으로 불렸음이 확인된다. 이중에 애국가란 이름으로 된 것도 불렸다. 이는 사립 <중화학원>과 사립 소안학교(19231927. 교장 김사홍. 교사 송기호 외 12인을 통한 애국창가교육의 결과였는데 김사홍(18831945) 송내호 그리고 중화학원의 강정태와 최홍길이 창가 교사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 재판 판결 때 애국가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신한민보 1933년 04월 06일 기사
 
특히 송내호는 서울 등지에서 불린 항일가를, 빈광국은 만주 등지에서 불리던 항일가를 수집, 정리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당시 불려 진 노래들은 대중적인 학도가류와는 다른 항일투쟁가였다. 증언에 의하면 쪽지에 가사를 적어 바지 가랭이에 숨겨 다니며불렀고 일경에 발각되면 예외 없이 가택 수색으로 이어져 결국 주재소로 잡혀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포대 나승만교수가 제시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창가하고 애국가를 항시 즐겨 불렀는디 애국가를 또 불렀습니다. 함부로 못 부르죠. 그런 책자 같은 것을 즈그들 못 찾을데다 감춰놓고 이따가는 떠들어보고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 증언에서의 애국가"는 항일가 자체를 총칭한 것으로 보는데, 다음의 증언에서 확인이 된다.
 
당시에는 일본 순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백지로 두껍게 만들어 바눌로 꿰매 조그마하게 만들고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 바지가랭이에 넣고 다녔다.”
 
이 애국가에는 소안학교가여권신장가옥중가독립군가독립가를 비롯하여 네 가지의 애국가란 명칭의 것이다. 그 중 네 가지의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증언 등에서 확인되는 가사는 이렇다.
 
애국가(1)
아세아주 동부에 반도 있으니
이름항 금수강산 계림이로다
 
애국가(2)
흔매우게 무궁하 만발했더니
동편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므로
아름다운 무궁화는 간곳이 없고
지공부사
내의육신 낸영혼은 이세상을 떠나도
남아계신 여러분은 복스러운 생활로
하던말도 다못하여 푸르러진 얼굴에
뜨거운 피눈물이 두줄기로 흐른다
넓고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채
고기잡는 아저비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사랑아 내사랑아 나의 사랑 한민아
내가비록 죽드라도 너를 잊지 않노라
한 살두살 점점자라 얼서너살 넘으니
일본놈께 구박함은 더욱서러 하노라
 
애국가(3)
장하고도 아름답다 무궁화 벌판
 
애국가(4)
삼천리강산이 기하고 묘하다
 
이상의 네 가지 애국가는 서로 다른 것이라면 이 시기 애국가의 다양한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노래운동을 전개한 소안도 사람들은 민족음악운동과 그 역사의 산 증인들”(노동은,노동은의 음악상자」․웅진출판사1996)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족함이 없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나승만과 노동은 교수의 글에서는 현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증언 과정에서의 누락으로 보게 된다. 말하자면 현 애국가가 불려진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