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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때 일본 언론의 보도

[맛있는 일본이야기 295]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후, 당일자로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은 즉각 호외를 발행했고 이튿날인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범인의 1인은 양복에 희끗희끗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식대(式臺) 뒤에서 범인 2명이 동시에 1개씩 수류탄을 던졌고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할 때 부근에 있던 도시락 상자 중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있음을 발견했다. 범인 중 2명은 수류탄 파편으로 자신도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고 중상을 입었다.” 고 보도했다.

사건 직후 호외에서는 범인을 괴지나인(怪支那人)이라는 둥 갈팡질팡하던 일본 신문들이 5월 6일자 호외에서는 ‘상해폭탄사건의 범인은 조선인’ 이라면서 군사당국이 5월 6일 오후 3시에 발표한 ‘범인’의 신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본적과 이름, 생년월일을 보도했다.

“본적: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
현주소: 상해 불조계(佛租界) 파이롱로 도혹코구 30
윤봉길 명치 40년 5월 19일생

윤봉길은 4월 29일 오전 7시 45분 홍구공원에 들어가 관민합동의 축하회가 곧차 끝나려고 기미가요를 합창하고 있던 11시 40분 경 연단 후방의 군중 속에서 나와 소지한 폭탄을 연단에 투척하여 시라카와 군사령관, 노무라사령장관, 우에다사단장(줄임)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줄임)



   
▲ 일본 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 자 호외 전면

윤봉길의 공술 상황에 따라 불조계에 거주한 다수의 조선인이 단체적 배경이 있는 것으로 인정됨에 따라 즉시 불조계 경찰당국에 요구해서 그 수배에 따라 29일부터 30일에 걸쳐 일대 수색을 실행하여 용의자 안창호 이하 12명을 포박하고 그 인도를 받음에 따라 현재 엄중 취조 중” 이라고 호외는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일본 신문은 연일 이 사건을 호외와 정규 기사로 보도해댔다. 당시 신문보도를 읽자니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조선 침략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이나 독립의지에 대해서는 알바가 아닌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의 처지에서 윤 의사 의거는 이천만 조선인의 울분의 표출이요, 만천하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의거였음을 83년이 지난 오늘도 한국인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일본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