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비썩 마른 체구의 재일 동포 배동록 씨를 만난 것은 5년 전 일이다. 당시 67살이던 그는 15년째 일본 땅에서 부모님의 강제 징용 사실을 일본인들에게 ‘증언’ 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2010년 11월 10일 치쿠호의 우스이초등학교에서 700번째 증언을 마친 바 있다.
“200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몇 번이나 ‘증언’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지원해주신 양심적인 일본 선생님들 그리고 강연할 때마다 나에게 보내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써내려간 아이들의 감상문에 힘을 얻어 지금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일본의 초,중,고등학교를 돌며 재일조선인들의 강제연행과 재일동포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증언하고 다니던 배동록 씨는 2006년 <조선대학교동창회장려상> 수상 소감에서 “강제 노역 증언”의 고달픔을 토로했었다.
▲ 힘겨운 갱 안의 작업 모습, 자고 먹던 합숙소 ‘함바’ 등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조선인 징용자 삶의 흔적들
배동록 씨의 아버지는 경남 출신으로 야하타제철소로 강제연행 당한 것은 1940년이다. 그 뒤 2년 후에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아이 넷을 데리고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당시는 태평양전쟁 중이라 일본은 ‘철이 곧 국가’라는 구호 아래 철 생산에 매달렸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위해 야하타제철소에만 6,0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주로 철광석이나 석탄운반, 석탄 캐기, 흙공사, 짐 나르기 등 가혹한 중노동에 투입되었으며 배동록 씨 어머니 역시 출산 3주 만에 산후 조리도 못 한 채 부둣가에 쌓인 철광석을 4명 1조가 되어 화물차에 실어 나르는 일을 해야 했다.
▲ 경남 출신으로 194년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간 아버지를 찾아 떠난 배동록 씨 가족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의 어머니는 “철광석에 묻혀 화물차 속으로 떨어져 중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배동록 씨는 당시 기자에게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번이고 “여러분 제발 재일동포가 살아온 어둡던 과거를 잊지 마세요.”라며 울먹였다.
그렇게 재일동포들은 야하타제철소를 비롯하여 탄광이며 군용비행장 건설현장에서 그리고 군수물자 공장 등에서 수많은 동포가 처참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은 배동록 씨와 같은 생생한 증언과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기자는 5년 전 조선인강제 징용현장 취재를 위해 큐슈 치코호 일대 탄광을 비롯한 숱한 징용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가는 곳 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강제노역의 증언을 들으며 침략자들의 간악함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은 이러한 조선인의 강제 노동 현장을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미명하에 이들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이에 한국, 일본, 독일의 비정부기구(NGO) 활동가와 학자 등 민간 인사들은 지난 8일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이 포함된 일본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과 관련해 독일인인 마리아 뵈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의장에게 어두웠던 역사도 함께 보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 한국인들 강제노역의 현장 하시마탄광이 있었던 <군함도(軍艦島)>
의견서에는 "하시마 탄광, 미쓰비스 조선소, 일본제철 등은 근대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해 식민지와 점령지 주민들을 노예적 상태로 만드는 일에 경제 방면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전범기업이고, 식민지 조선의 주민 6만여 명과 중국인 노동자 등을 강제동원해 노예노동에 가까운 인권 침해를 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삭제한 채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이란 미명 하에 편법을 사용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은 강제동원·강제노동의 피해자는 물론 유네스코의 창립정신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앞으로 세계유산위원회 21개국 위원 전원에게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제작된 강제징용자 증언 영상 등 각종 참고 자료를 보내고, 이 위원회가 독일 본에서 등재 결정 회의를 여는 6월 28∼7월 8일에 맞춰 강제징용 피해 전시회를 개최하는 한편 관련 집회도 준비할 계획이다. 일본이 등재를 추진 중인 23개 시설 가운데는 조선인이 강제징용됐던 나가사키 조선소 제3 드라이독·대형크레인·목형장, 다카시마 탄광, 하시마 탄광, 미이케 탄광 및 미이케 항, 야하타 제철소 등 7개 시설이 포함돼 있다.
치욕스런 조선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더욱이 조선인의 참혹한 강제징용의 현장을 묻어 버리고 ’명치시대의 근대 유산‘이라는 시각에 함몰되어 있는 일본의 끝없이 추락하는 ’양심‘이야 말로 한국인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꼴이다. 양심있는 일본인의 힘있는 목소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