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는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사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비중이 컸다. 서양은 농축업의 기본 틀인 봉건제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 진데 견줘 동양은 기술발전에 늦어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중세 왕권제도 시대에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에 대한 대처를 통해 세종의 정치 지도력을 알아보자. 백성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배려의 발로인 ‘민생가려’로 재해가 다가오면 세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순서와 시기를 고려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한 임금이 세종이다. 한 예로 지난 호에서 보았듯 밭에서 태종 4년 경기도를 빼고서도 25년 뒤 642,352결이 늘오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장마나 가뭄, 질병 등의 재해가 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해지역 조사에 들어갔다. 그다음 조치는 해당지역의 ‘조세 감면’이었다. ⋅조세를 감면하다 (사간원에서 흉작의 정도가 심한 주군의 조세를 면제할 것 등을 상소하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의 산업 곧 먹고 사는 길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사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서양은 농축업의 기본 틀인 봉건제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 진데 견줘 동양은 기술발전에 늦어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중세 왕권제도 시대 세종은 농업이 주 산업인 시대에 만약 가뭄이 들면 민생 대책을 어떻게 세웠을까? 이러한 연구를 하려면 다른 시대, 다른 임금들과 견줄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것을 통해 세종의 정치 지도력ᅇᅳᆯ 알아보기로 한다. ‘‘민생가려’라는 백성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배려를 세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시기적으로는 오가고는 하지만 재해를 맞아 일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순서와 시기를 고려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에 대해 출현 횟수를 보면 국역 모두 3,463건 가운데 세종 323건, 성종 454건, 중종 474건, 숙종 224건, 영조 255건 등으로 중종, 성종 다음으로 많았다. 유사한 ‘장마’를 찾아보면 모두 930건 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임금은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이 잘살게 하는 정책을 펴는 사람이다. 정책의 기준을 관리들 편의에 두느냐 백성의 편에 서느냐가 관건이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욕구는 끝이 없고 그때마다 임금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상대방 곧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때도 있다. 지방관리가 부당하게 처결할 때는 백성은 누구에게, 어디에다 하소연을 전달할 수 있을까. 세종 13년에 이런 문제에 논의가 있었다.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고을 사람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지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 태종(太宗)께서도 기꺼이 들으시어 경자년(1420)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이에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마을 사람들과 수령에 대한 관계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식위민천’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8건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세종 때 8건이다. 다른 임금은 성종이 5건으로 많다. 두 분 다 어질다고 존경받는 임금들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8일 즉위한다. 즉위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라는 명제를 선언한다. 즉위식에서 선언한 ‘시인발정’(施仁發政, 백성사랑은 임금 노릇의 근본)의 구체적인 시행책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온데, 이제 흉년을 만나 민생이 염려되오니, 각 군의 조세를 경창(京倉)에 전부 바치는 것을 제하고는, 곡식으로 거두어 각기 그 고을에 두었다가, 내년의 씨앗으로 예비하게 하고, 그 농사를 그르침이 더욱 심한 주ㆍ군(州郡)은 조세를 전부 면제하시기를 청하나이다. 그리고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여, 그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우리나라 남쪽 지경에 와서 배를 대고 해변의 백성들과 교역한 지 오래 되었는 바, 지금 우리는 기근으로 재물이 없어 교역하지 못한즉, 왜적이 의식을 얻을 곳이 없게 되면 반드시 도둑질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으로 정치를 잘하였다는 평가는 우선, 생각한 것을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듣는 일일 것이다. 임금은 우월적 지위에 있으므로 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또한 때로 나)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막으며 다) 의견 개진을 어렵게 하거나,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세종은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때로 독단으로 처리한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 신념[철학]에 따른 것이어서 전체 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실록에 나타난 예를 보자. (의산군 남휘의 간통과 폭행 등의 범행을 처벌해달라는 상소문) 우사간 이반(李蟠)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인군(人君)의 아름다운 덕행이라 하옵니다. 근일에 헌부에서 의산군 남휘(南暉)의 범행한 바를 두세 번 신청(申請, 일을 알려 청구함)하였사오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전하께서 간(諫)함을 좇고 말함을 들어주시는 미덕에 어떠할까요? (⟪세종실록⟫ 6/8/4) 이 문제는 종친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와 오늘 다룰 ‘여경사지’(予更思之)의 표현이 눈에 띄는 임금이 세종이다. ‘반복사지反復思之’는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이 51건이다. ‘여경사지’는 ⟪조선왕조실록⟫ 모두 79건 중 세종이 38건이다. 일을 거듭 생각하여 처리했다는 뜻인데 이는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이거나 아니면 실록의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이런 ‘반복사지’란 어떤 사건을 독단으로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모든 면에서 대화 곧 사맛의 논리[메커니즘] 다시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법칙을 준수하려 했다고 보인다. 셋째 세종은 가능하면 사람을 벌하기보다 품고 가는 융화(融和)의 정치를 하려 했다고 보인다. 곧 융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가려는 정신일 것이다. 관리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비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이 이런 상황을 잘 아우를 수 있느냐다. 그리하여 지난 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2024년 10월 9일은 훈민정음 창제 578돌이 되는 날이다.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訓民正音)해례본 서문을 보자.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언해본 원문인 世솅〮宗조ᇰ御ᅌᅥᆼ〮製졩〮訓훈〮民민正져ᇰ〮音ᅙᅳᆷ을보자. 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세종 당시의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몇 가지 창제 환경을 보자. ㆍ“원리를 보면,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특히 세종 때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의 표현이 눈에 띈다. 첫째 이런 ‘반복사지’의 표현이 쓰인 사건은 그 일을 신중히 처리했다는 증거다. 곧 어떤 사건을 독단으로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모든 면에서 대화 곧 사맛의 논리[메커니즘]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증거다. 의사소통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법칙을 준수하려 했다. 셋째 세종은 가능하면 벌하기보다 용서하고, 사람을 안고 가는 융화(融和)의 정치를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곧 융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포용하고 가려는 정신이다. 관리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비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이 이런 상황을 잘 아우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는가? 여부인데 여기서 세종의 포용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맞닥뜨리는 일이란 범죄 유무, 민생과 직결되는 답험손실법(토지개혁법의 하나)에 관련된 문제, 세자의 남면(南面, 대리청정) 문제, 불교의 폐단,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돈) 사용문제 등 당시 정치 현안으로서는 변화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어떤 논제가 올라오면 논의를 통해 신중히 처리되겠지만 세종 때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의 표현이 눈에 띈다. ‘반복사지(反復思之)’는 ⟪조선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 때 51건, 다음은 성종 19건이고 나머지 임금에서는 한두 건이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인지 아니면 실록의 해당 기사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답은 실록 기사 세종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결같이 이런 ‘반복사지’의 표현이 쓰인 기록은 일반 사건보다는 신중을 요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의 범죄 유무, 민생과 직결되는 답험손실법에 관련된 문제, 세자의 남면(南面) 문제, 불교의 폐단, 저화 사용문제 등 당시 정치 현안으로서는 변화나 변혁과 관계되는 신중한 토론을 요 하는 과제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숙고 처리했다는 실증이다. 그 예들의 기사를 보자. (삼성에서 이종무의 공신권을 걷어 들이도록 상소하다.) 삼성(3개의 최고의 의정 기관)에서 상소하기를, "이종무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는데, 낮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국가를 이웃 나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첫걸음은 먼저 이웃나라와 평화 시에 원활한 교류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이에는 물적, 인적 교류가 활발한 것은 물론 문화나 사상, 종교와 같은 높은 단위의 교류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교린지의(交隣之義)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의(義)라고 하면 정의(正義)가 연상되는데 정의란 ‘올바른 행동과 도덕적인 원칙’이다. 중세의 가치철학으로는 임금에게 충[事君以忠], 친구 사이에는 신{朋友有信]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사이에는 의(義)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록 번역에서는 친선이나 정리로 번역해 놓았으나 의(義)라고 하면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에서 책임감, 상호존중, 그리고 도덕적 원칙과 값어치를 지키고 나아가 사회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실록에 일본과의 교류에서 ‘교린지의交隣之義’로 나오는 내용 몇 예가 있다. 예물로 친선을 닦는다 우리 백성이 표류하여 일본에서 편의를 제공받고 있으니, 그에 대응하여 대장경과 선물들을 보낸다는 것이다. 교류는 현실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