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태어난 곳: 전라남도 나주 한글마을 무덤이 있는 곳: 경기도 의정부 고산동 산 53-7 올해는 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이 되는 해다.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 국방, 외교 등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세조 집권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장소 ------------------------------------------------------------------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절대적인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학자요 관리였다. 43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가다 교도소 입구 건너편 고산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들어서면 ‘신숙주 선생묘’라는 길안내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왼쪽 산 중턱에 바로 보한재 신숙주 무덤과 한글 공적비가 있다. 이 묘소는 신숙주의 무덤과 신도비, 사적비가 있는 곳으로 고령 신씨 문중공파 종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무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지난 1월 21일. 한파가 몰아친, 눈발이 날린 토요일, 전국독서새물결모임 독서아카데미 초중고 학생들 37명을 데리고 한글가온길 답사를 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세종로공원의 한글글자마당에서 한글가온길의 의미를 되새기며 모두들 한글만세를 외쳤다. 세종대왕 동상을 뒤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길 건너 정부종합청사 쪽으로 오게 되면 세종로 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2011년도에 먼저 조성된 글자 마당과 2013년도에 조성된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이 있다. 글자마당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한글 첫소리(19자), 가운뎃소리(21자), 끝소리(27자) 글자로 조합 가능한 11,172자를 재외동포, 다문화가정, 국내거주 외국인, 새터민 등을 포한 전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하여 11,172명이 각각 한 글자씩 직접 쓴 글씨를 돌에 새겼다. 마침 이때 공모하여 자신의 글씨가 뽑힌 박정애 세종연수원 대표가 참가하여 공모 경위와 글맵시를 설명해 참석자들의 손뼉을 받았다. ‘릱’이란 글자인데 ‘ㄹ’자를 태극 모양으로 하여 천지자연의 조화를 담은 한글의 가치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11,17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은 47살 때인 음력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고 50살 때인 1446년 9월 상한(1일-10일)에 《훈민정음》이란 책을 통해 새 문자를 백성들에게 알렸다. 1443년 음력 12월은 훈민정음 28자가 세상에 공개된, 그야말로 훈민정음 28자의 기적이 일어난 달이다. 그 기적은 세상에 57자의 단출한 기록으로 드러났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자(세종실록 온라인판 영인본에 의함) (번역)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본뜨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간결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공교롭게도 북한은 창제한 날을 남한은 반포한 날을 기념일로 삼고 있다. 분단의 아이러니이지만 이제는 남북이 연계하여 창제한 날과 반포한 날을 함께 기려야 한다. 필자는 창제한 날은 문자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장소 조선 성종 임금이 다스리던 1485년(성종 16년)에 한글 관련 큰 사건이 벌어졌다. 종로 시장 상인들 가운데 한글을 아는 이들이 오늘날 장관격인 호조 판서 이덕량의 동생 집에 한글로 그들을 비판하는 투서를 몰래 전달했다. 영의정부터 판서까지 고위 관리들이 종로의 도로 정비 사업을 한다며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내용이었다. 이덕량은 그것을 읽고 곧바로 성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성종은 판내시부사 안중경과 한성부 평시서 제조 등을 보내 상인들의 요구 사항을 듣게 했지만 끝내 한글을 아는 자들을 처벌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하층민에 속한 상인들도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종로는 1호선인 종로 2가역, 3가역이 있는 서울의 중심지다. 종로 3가는 3호선과 5호선도 서는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조선 시대 때도 전국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이 있었던 자리다. 서울시는 옛날 시장터에 시전행랑을 복원해 놓았다. 사건 연보 1485/07/17(성종 16) : 호조 판서 이덕량 등이 시장 사람들의 언문 투서(익명서) 두 장을 바치다 1485/08/02(성종 16)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글날은 2013년 공휴일로 지정된 뒤 그야말로 큰잔치로 자리 잡았다.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은 하루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서울뿐만 아니라 여주시, 세종시, 울산시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관련 행사가 꼬리를 문다. 2013년부터 이러한 한글날을 기리면서 온 국민이 한글날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하는 소책자(14.9*20.9cm)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펴내 해마다 인기를 끌고 있다. 해마다 다른 방식으로 2016년까지 다음과 같이 네 번 펴냈다. 주요 특징과 더불어 필자가 대표 집필하게 된 배경을 밝혀 보고자 한다. 이 책자를 펴내기에는 이제는 고인이 된 김혜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장이 한글을 위해 몸 바쳐 일한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어 고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3). 10+9. 문화체육관광부. 66쪽.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4). 3+5(12단 접이형).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8단 접이형).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5),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 역사의 상상 18세기 후기 정조(재위 1776~1800) 시절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1815), 정약용(1762~1836) 등 많은 실학자들이 세검정에서 회합을 갖고 몇 가지 조정에 건의할 강령을 채택하고 정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정조의 개혁 정치가 더욱 힘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의 보수 정치에 주춤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행동에 난선 것이다. 실학의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의 발걸음이었다. 일부 평민들도 동참했다.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중종 때 어숙권이 건의했다가 실패한 책방 설치를 전국 주요 도마다 최소 하나씩 설치한다. 둘. 지식과 정보를 쉬운 문자와 책으로 보급하고 나누고자 했던 세종 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삼는다. 셋. 한글을 주류 문자로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실록도 한글로 적고 모든 공문서도 단계적으로 한글로 적는다. 넷. 공공 교육 기관에서 다루지 않은 한글 교육을 서당과 향교부터 단계적으로 정규 교과로 다룬다. 다섯. 한글 문학을 장려하고 기존 한문 문학을 한글로 번역한다. 정조도 익히 마음에 둔 정책들이라 이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책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세종 임금이 아무리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어도 1894년 고종이 국문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된 공식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도 공식문자였다는 것이다. 한자 다음의 비주류문자였지만. 국어교과서처럼 공식 문자가 아니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공식문자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제도나 법으로 규정하거나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공식 제도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왕실에서 만들고 나라에서 펴낸 《사서언해》와 같은 책에서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헌법과 같은 조선 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한글을 국가 공무원 시험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시험 과목으로 정했고 또한 삼강행실도와 같은 국가 윤리서를 한글로 옮겨 백성들에게 알리게 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라의 중심인 임금들은 모두 한글 문서를 나라 정책으로 활용했다. “《삼강행실》(예의범절 규범서)을 언문(훈민정음, 한글)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집안의 어른, 어르신, 또는 서당의 스승들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라. 만약 삼강행실 가르침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
▲ 《세종대의 음성학》, 한태동(2003), 연세대출판부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8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537돌 한글날 기념 학술 강연회에서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라는 당시 연세대 한태동 교수의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국어학자들이 규명하지 못했던 훈민정음의 음악 배경에 관한 발표였기 때문이다. 이 발표는 한태동(1985).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 나라글 사랑과 이해(국어순화 추진회 엮음). 종로서적. 214-266쪽.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8년에는 世宗代의 音聲學이란 단행본으로 출판(연세대출판부)되었고 2003년에는 한태동 선집 4권으로 다시 펴내면서 《세종대의 음성학》으로 거듭 출판되었다. 신학자의 발표라 더욱 흥미를 끌었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전반기는 암울한 시대였다. 캠퍼스는 늘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고 상아탑은 자주 술렁거렸다. 운동권이냐 비운동권이냐는 이분법의 아픔은 있었지만 서로가 시대의 고민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학생들의 학구열은 식지를 않았다. 그 가운데 명강의에 대한 열풍이 있었다. 역시 연세대에도 3대 명강의가 있었는데 그 중 으뜸이 한태동 선생의 기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시는 날로 팽창하고 있다. 2030년까지를 도시 건설 완공 목표로 착착 진행됨에 따라 실제 거주 인구가 2015년에는 전년대비 30%이상 증가하여 2016년 3월 현재 인구 227,025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는 양적 발전에 걸맞은 세종시의 위상을 세우는 일을 좀 더 고민할 때이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도시다운 세종 정신으로 내실을 다지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세종과는 아무 관계없이 ‘세종’이 들어간 수많은 상호들과는 격이 다른 ‘세종’의 이름값을 해야 할 의무가 세종시에 있다. 사실 세종시는 처음부터 한글 디자인과 우리식 건물명 등을 통해 세종 정신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세종 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침 이춘희 세종시장과 이충재 행복건설청장 모두 세종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물론 이 문제는 지도자 의지만으로 이뤄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세종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여 세종시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종시에 세종학 대학원대학교 설립을 제안한다. 세종학은 세종대왕에 대한 인물론부터 그가 남긴 업적과 계승 문제를 연구하는 일종의 융합학문으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위인들의 태몽은 위인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곤 한다. 필자도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고 위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태몽을 어머니께 여쭈었다가 기억이 안 난다는 어머니 말씀에 낙담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위인 중의 위인 세종의 태몽이 궁금했다. 이러 저리 찾아보니 여럿 기록들에 세종의 어머니인 민씨(훗날 원경왕후)가 햇무리 한가운데 세종이 앉아 있는 꿈을 꾸고 세종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조사해 보니 사실 이 꿈 이야기는 태몽이 아니라 세종이 네 살 때인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 어머니 민씨가 꾼 꿈이었다. ▲ 이방원의 비 민씨(뒷날 원경왕후)가 꿈을 꾸니 햇무리가 있었고, 그 안에 막동(세종)이 앉아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세종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5년째 되던 1397년에 태어났지만 곧바로 정치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자라난다. 두 살 때인 1398년에 아버지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 방번’ 두 이복동생과 정도전 쪽 사람들을 없애는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는 물러나고 1398년에 정종이 즉위하고 1400년에 이방원이 친형인 이방간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