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의 음성학》, 한태동(2003), 연세대출판부 |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8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537돌 한글날 기념 학술 강연회에서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라는 당시 연세대 한태동 교수의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국어학자들이 규명하지 못했던 훈민정음의 음악 배경에 관한 발표였기 때문이다.
이 발표는 “한태동(1985).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 <나라글 사랑과 이해>(국어순화 추진회 엮음). 종로서적. 214-266쪽.”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8년에는 <世宗代의 音聲學>이란 단행본으로 출판(연세대출판부)되었고 2003년에는 한태동 선집 4권으로 다시 펴내면서 《세종대의 음성학》으로 거듭 출판되었다. 신학자의 발표라 더욱 흥미를 끌었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전반기는 암울한 시대였다. 캠퍼스는 늘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고 상아탑은 자주 술렁거렸다. 운동권이냐 비운동권이냐는 이분법의 아픔은 있었지만 서로가 시대의 고민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학생들의 학구열은 식지를 않았다. 그 가운데 명강의에 대한 열풍이 있었다. 역시 연세대에도 3대 명강의가 있었는데 그 중 으뜸이 한태동 선생의 기독교 사상사였다. 학문에 열정이 있는 친구들은 전공에 관계없이 한태동 선생의 서너 강좌를 순례하듯 들었고 서로의 열정을 나눴다.
필자도 그 대열에 동참해 지금도 그 때의 강의 장면이 생생하다. 늘 큰 강당에서 강의가 진행되었고 학생들로 붐볐다. 선생님께서는 강의가 시작되면 늘 커피 한 잔을 드시며 눈빛을 교감한 뒤 강의를 시작하셨다. 소년 같은 온화한 미소와 따스한 차 향기는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대학자에 대한 거리감을 좁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을 주었다.
강의는 세 시간 가운데 딱 한 시간만 하셨다. 대개 그림이나 도형 같은 것으로 사상사의 흐름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시고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한번 고민해서 다시 정리해서 보고서로 내라는 식이었다. 한 시간의 강의는 뭔가 진한 여운을 남겨 주었고 마치 내가 대사상가의 머리를 분석해 그 위에 올라앉은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구파들은 늘 이 강의를 기웃거렸고 하나같이 지적 희열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1983년 세종 탄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께서는 느닷없이 강의 내용과 관련 없는 말씀을 꽤 오래 하셨다. 다름 아닌 세종대왕 얘기였다. 웬 우리과(국문과) 얘기지 하며 귀를 쫑긋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세종의 위대한 사상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과 악학궤범에 담겨 있는데 그 사상 구조를 밝히기 위해 각종 악기와 첨단 기계를 동원해 소리 분석을 하고 계시다는 거였다.
솔직히 그때는 그 내용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를 거의 몰랐다. 선생님께서는 이 연구 결과를 같은 해 한글날에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셨고 이를 크게 보완하여 1998년에 《세종대의 음성학》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셨고 다시 편집한 책을 2003년에 펴내셨다.
필자는 어리석게도 그 강의를 듣고 20년이 흐른 뒤 훈민정음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하면서 겨우 그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올해 5월 10일 훈민정음학회에서 이 책의 진가를 알리는 논문 발표도 하고 보니 연세 동산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얻은 기쁨에 새삼 눈물이 솟는다.
이 책에서 선생님께서는 “(훈민)정음은 어느 특정된 나라의 어음이 아니고 언어를 위한 언어로 구성되어 모든 언어의 기틀이 되는 위대한 언어 체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음은 만민의 언어학의 기틀이 될 것이고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2003: 130).”라고 하였다. 이제 세종의 업적과 훈민정음의 보편 가치가 세계적으로 평가가 되고 있고 훈민정음으로 사라져 가는 인류 언어를 보존하려는 사업이 몇몇 진행되고 있는 터라 마치 이 말은 예언처럼 들린다.
이 책의 진가를 아는 이는 지금도 손가락을 뽑을 정도다. 동양의 수리철학과 음악 이론, 언어학 이론 등 관련 분야를 모두 꿰뚫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실제 음악과 천문학에 대한 당대 최고 수준의 연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성공했다. 과학과 인문학, 음악에 정통한 한태동 선생님 같은 진정한 융합학자만이 훈민정음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몇 안 되는 훈민정음 전공자가 된 것은 아마도 1983년 한태동 박사님 강의를 경청한 인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세종은 소리와 문자가 넘나드는 정음을 통해 문자 소통이 가장 자유로운 정음 세상을 열었다. 세종은 자연주의 철학과 음악 조화주의와 과학 생성주의로 다양한 말소리의 역동성도 함께 담아냄으로써 훈민정음의 ‘바름’이 지향해야 하는 바른 세상의 길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제시하고 한태동(1983)에 이르러서야 그 진가가 제대로 빛을 낸 것이다.
김슬옹 / 세종대왕나신곳성역화 국민위원회 사무총장, 인하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