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태어난 곳: 전라남도 나주 한글마을
무덤이 있는 곳: 경기도 의정부 고산동 산 53-7
올해는 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이 되는 해다.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 국방, 외교 등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세조 집권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 장소
------------------------------------------------------------------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절대적인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학자요 관리였다. 43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가다 교도소 입구 건너편 고산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들어서면 ‘신숙주 선생묘’라는 길안내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왼쪽 산 중턱에 바로 보한재 신숙주 무덤과 한글 공적비가 있다.
이 묘소는 신숙주의 무덤과 신도비, 사적비가 있는 곳으로 고령 신씨 문중공파 종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무덤은 부인 윤 씨와의 합장묘이며 두 개의 무덤 가운데 왼쪽이 신숙주 무덤이다. 무덤 사이에는 고종 건양 2년인 189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앞에는 상석(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돌)과 향로석(향피우는 화로를 놓은 돌)이 있고 무덤 좌우에는 문인석(문인 모양의 돌)과 무인석(무인 모양의 돌) 한 쌍씩이 서 있다. 문인석이 무인석보다 한 계단 위에 있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비각 안의 신도비이고 또 하나는 그 밑 길 옆의 신도비다. 비각 안의 신도비는 이승소가 글을 지어 성종 8년(1477)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받침돌과 비몸이 정사각형이고 신도비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밑의 신도비는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 옆에는 1971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날 세운 “문충공 고령 신숙주선생 한글창제 사적비”가 있다.
신숙주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나주로 지금은 한글마을로 지정돼 있지만 아직은 마을 꾸미기가 제대로 안 되었다.
◆ 인물
--------------------------------------------------------
신숙주는 보통 보한재라는 호로 흔히 불린다. 한가로이 공부에만 열중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신숙주는 태종 17년인 1417년에 태어났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1년 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예종, 성종을 더불어 섬기고 57살 때에 운명했다.
신숙주가 처음 벼슬에 오른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438년(세종 20)에는 두 번의 과거에 붙어 동시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 전인 스물다섯 살 때인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지냈고 창제 1년 전 26살 때인 1442년에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에 뽑혀 국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반포하는 데 매우 큰 공을 남긴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사와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여러 차례나 다녀왔다.
1447(세종 29)년 31살 때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동국정운》⋅《사성통고》를 펴내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36살 때인 1452(문종 2)년에는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 대표로 갈 때 서장관으로 함께 가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37살 때인 1453(단종 1)년에는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일찍이 수양대군과 가까웠던 탓에 공신이 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42살 때인 1460(세조 6,)년에는 강원ㆍ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여 국방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53살 때인 1471(성종 2)년에는 성종의 명으로 세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 《해동제국기》를 지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내내 일본과의 외교 지침서가 되었다.
54살 때인 1472(성종 3)년에는 《세조실록》ㆍ《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의 펴냄을 총괄하였다 . 또 세조 때 펴냄을 명받은 《국조오례의》의 고쳐 펴냈고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번역 관련 책을 펴넸으며, 또 일본ㆍ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 사건
----------------------------------------------------------------------
때는 1444년 2월 16일.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세종임금은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을 어전으로 불러 들였다. 세자 이향(뒤에 문종)과 둘째 아들 진양대군(수양대군) 이유,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도 참석하였다.
세종: 중국 발음책 《고금운회(중국 송나라 황공소 지음)》를 한글로 두치는(번역) 일이 꽤 진척이 되어 그대들을 치하하기 위해 불렀소. 짐이 왕자들을 통해 수시로 보고는 받아서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빨리 진척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최항: 소신들은 전하가 가르쳐 주시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세종: 외국어에 능한 부수찬(신숙주), 이 일을 해보니 새 문자가 어떻소.
신숙주: 새 문자의 효용성이 신묘하여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발음 책은 전하께서 자상하게 알려 주신 바와 같이 한자는 뜻글자이온지라 자신들의 발음조차 정확히 적을 수 없어 두 글자를 쪼개 설명하는 ‘반절법’을 만들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고(高)’자의 경우 이를 반으로 쪼갠 ‘ㄱ’은 ‘경’자의 ‘ㄱ’과 같고 ‘ㅗ’는 ‘조’의 ‘ㅗ’와 같다는 식이옵니다. 그런데 우리 정음(한글)은 그대로 ‘고’라고 적을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정확한지 모르옵니다.
세종: 원나라 웅충이 몽골 글자인 파스파(1269년에 반포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라진 문자) 문자로 발음을 적은 것은 어떠하오.
신숙주: 파스파 문자도 소리 문자인지라 중국의 반절로 적은 것보다 훨씬 낫사오나 역시 우리 정음 처럼 정확히 적을 수 있는 문자는 아니옵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는 강희안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강희안: 섬세한 발음을 정확히 적으니 새 문자가 마치 소리가 꿈틀대는 그림 같사옵니다.
세종: 바로 그렇소. 내가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참고해서 새 문자를 만들기는 했으나 바로 그런 차이가 있소. 파스파 문자는 닿소리(자음) 30자, 홀소리(모음) 8자, 기호 9개로 되어 불편해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니 그런 불편한 문자를 우리가 본받을 필요는 없소. 이제 새 문자의 중요성은 그대들 이 더 잘 알 줄 믿소.
박팽년: 한자든 중국어이든 우리말이든 발음을 정확히 적어 표준을 만들어야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사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세종: 내 그대들을 부른 것은 중국 요동 땅에 다녀오게 함이오.
세종: 그대들도 중국의 저명한 음운학자인 황찬을 알 것이오. 그가 요동에 귀양 와 있다 하니 가서 만나보고 오시오.
신숙주: 중국 운서에 대한 번역과 연구 자문을 구하고 오란 말씀이온지요.
세종: 그렇소. 중국 운서를 통해 정확한 중국 발음과 이에 대한 짜임새 있는 이해가 가능은 하지만 그래도 중국학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 백 번 낫겠지요.
이런 고된 여정에서 신숙주와 성삼문이 직접 남긴 시가 남아 있다.
“잇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어금닛소리, 발음 아직도 익숙지 못하니
특히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뿐만 아니라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동국정운》을 세종과 함께 펴내는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사신 : 복건(福建) 땅의 음(音)이 조선과 비슷하니 그곳 발음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숙주: 여보게들 이제 《동국정운》 마무리를 하려니 감개무량하이.
삼문: 우리는 본문 교정이 거의 다 끝나 가는데 자네 서문 쓰는 것은 어찌 돼가나.
팽년: 참으로 명문이네. 사람이 다르면 소리도 다르고, 지방이 다르면 소리도 다르니 뜻은 통할지라도 소리가 다른 경우가 많은 것 아니겠나?
삼문: 우리나라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말의 소리가 중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네들이 매끄럽게 연결해 주었네.
이리하여 신숙주는 여러 신하들과 밤낮으로 연구하여 1449년 《동국정운》을 펴냈다. 이 책 머리말에서 신숙주는 이렇게 적었다.
동국정운은 바로 가장 이상적인 말소리의 표준을 적은 책이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이란 책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