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 역사의 상상
18세기 후기 정조(재위 1776~1800) 시절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1815), 정약용(1762~1836) 등 많은 실학자들이 세검정에서 회합을 갖고 몇 가지 조정에 건의할 강령을 채택하고 정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정조의 개혁 정치가 더욱 힘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의 보수 정치에 주춤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행동에 난선 것이다. 실학의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의 발걸음이었다. 일부 평민들도 동참했다.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중종 때 어숙권이 건의했다가 실패한 책방 설치를 전국 주요 도마다 최소 하나씩 설치한다.
둘. 지식과 정보를 쉬운 문자와 책으로 보급하고 나누고자 했던 세종 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삼는다.
셋. 한글을 주류 문자로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실록도 한글로 적고 모든 공문서도 단계적으로 한글로 적는다.
넷. 공공 교육 기관에서 다루지 않은 한글 교육을 서당과 향교부터 단계적으로 정규 교과로 다룬다.
다섯. 한글 문학을 장려하고 기존 한문 문학을 한글로 번역한다.
정조도 익히 마음에 둔 정책들이라 이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책방이 설치되니 다양한 책 유통이 활성화되고 양반의 지식 독점이 깨지면서 나라 전체가 서서히 바뀌어간다. 어느 정도 이러한 정책이 자리 잡을 무렵 정조가 갑자가 서거한다.
정조가 붕어하자 모든 개혁 정책이 원점으로 돌아오고 오히려 세도정치의 더 과거로 회귀한다. 그러나 이미 널리 보급된 한글 소설을 비롯한 많은 책을 통한 지식 유통의 봇물은 막을 수 없었다. 세도정치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각 계층의 개혁 세력은 더욱 힘을 모으고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려 서구의 근대 못지않은 자생적 근대화가 이루어진다. 서구와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지만 이미 세종 시대의 과학과 문명을 재현한 조선의 힘이 오히려 제국주의 침탈을 막고 제국주의 세력들은 조선의 역사 주도에 휩쓸리게 된다.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100% 상상이다. 실제는 정반대였다. 세종을 늘 존경했다는 정조는 문자 정책만큼은 세종을 따르지 않는다. 쉬운 문자로 백성을 가르치고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거대한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 정조가 직접 남긴 홍재전서는 100% 한문이다.
물론 영조 때부터 백성에게 내리는 글인 윤음을 한글로 펴내는 횟수는 훨씬 늘었지만 그렇다고 한문 중심의 국가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바뀐 건 아니었다. 당대의 최고의 실학자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도 한글 사용을 거부하고 100% 한문으로만 저술을 남긴다. ‘거부’라는 말을 쓴 것은 보통 다른 사대부 양반들은 학문이나 공적 상황에서는 한문을 쓰고 사적인 부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한글을 쓰는데 그조차도 안하니 ‘거부’라는 말을 쓴 것이다. ‘거부’ 수준이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한글 사용을 기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시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때는 1800년 기준, 한글이 반포된 지 354년이 되던 때였고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0년이 지난 해였으며 서학이 거세게 몰려들어오는 시점이었다. 지식의 실용화와 대중화에서 책과 문자가 절대적임은 누구나 공감할 터, 실학자들의 문자사용 퇴보 결과는 참혹했다. 세도정치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일제 36년이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추론이 결코 과잉이 아님은 일본과 견주면 금방 알 수 있다. 일본은 8세기 무렵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우리가 한자를 우대하여 ‘진서(眞書)“라고 불렀듯이 한자를 진짜 문자라는 뜻으로 ’진자眞字」(mana 진짜 문자)라 하고, 그러한 진짜 문자를 빌려서 사용한 ‘가짜 문자’라는 뜻으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나假字」(karina)’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에도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에는 귀족이나 승려 등을 중심으로 가타카나(片假名)와 히라가나(平假名)라는 일본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면서 한자와 대등한 자격을 부여했고 실제 한문 지식을 풀어쓰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당연히 왕실도 가나가 섞인 책자로 왕세자 교육을 시켰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적극적인 지식의 실용화를 거부한 우리가 지식의 실용화에 성공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은 일본을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다산의 위대한 학문과 소통
필자는 수원에서 30년을 살았다. 정확히 수원성(화성) 옆에서 자랐다. 수원성은 정조 개혁의 상징이자 실학 정신의 최대 성과물이다. 수원성을 건설하는데 정약용이 발명한 거증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수원성 건설 백서인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원성에서 자란 나는 거증기를 발명한 정약용을 흠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정약용을 통해 실학과 실학자를 경외하기까지 했다.
다산학의 권위자이신 정민 교수는 이런 글을 남겼다.
“다산은 18년간의 강진의 유배생활 동안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다. 한 사람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은 좋이 걸릴 작업을, 그는 처절한 좌절과 척박한 작업환경 속에서 마음먹고 해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엄청나고 방대한 작업을 다산은 어떻게 소화해 냈을까?” -정민(2006).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 김영사. 6쪽.
정약용이 남긴 저술은 경서류 232권, 문집류 260여 권에 이른다. 지금 책 개념으로는 118권정도 된다고 한다. 정약용의 이러한 방대한 저술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그 많은 저술이 100% 한문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더욱이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까지도 철저히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도대체 실학이란 무엇인가? 거증기에서 보여준 실용성과 합리성의 실체는 무엇이고 소통의 실용성과 합리성은 별개의 문제인가? 정약용의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왜 지식과 문자(언어)에 대한 시선으로는 옮겨가지 않았을까? 정약용 사상의 위대함은 왜 표현과 소통의 위대함으로 이어지지 못했나?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이 아침마당에 나오셔서 정약용과 박지원의 소통 정신을 배우자고 했는데 그때의 소통은 무엇인가?
물론 이런 비판은 다산의 위대함에 대한 아쉬움이다. 정약용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통섭 학자이자 실학의 대가이다. 역경을 위대한 사상과 학문으로 승화한 사람이고 정조 개혁의 주체였다. 정약용은 당대의 최고 학자로서 빼어난 한문 구사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글은 정약용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실학은 성리학의 요소가 남아 있으나 탈성리학의 흐름이 강하다. 현실 지향 논리인 ‘실사구시’, ‘경세치용’ 등을 핵심 이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비판적 사상운동이다. 그런데 문자와 지식 소통에서는 철저히 실용성 무시한 셈이다.
실학은 성리학의 이념 중심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한문 경전에 가둔 교조주의는 더욱 깊게 답습을 했다. 다음은 양반 사회의 모순을 꼬집은 박지원의 양반전과 현대 번역문이다.
실학은 인간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그런데 표현 주체로서의 인간 문제는 외면했다. 실학은 고전 탐구에서 관념론적 선험론을 극복하고 실증주의 방법 추구했다. 그러나 탐구 과정과 결과에서 쉽게 풀기 위한 언어 노력 소홀했다. 퇴계 이황은 한글 주석을 통해 성리학 경전을 더 쉽게 풀어낼 수 있다고 ‘논어집주’라는 책에서 고백한 바 있다.
실학은 양반 사회 모순을 질타했다. 양반들은 가마 타는 즐거움만 알뿐,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표현과 의사소통 독점과 배타적 양반지식 문화는 외면했다. 실학은 문학에서의 자주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조선시, 조선다운 한문, 감성 등을 강조했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을 정도다.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나는 조선사람이니 조선 시를 달게 짓겠노라“__이상수(1999). 한국어로 철학하기. 《창작과 비평》 27-4. 창비. 290쪽.
그러나 가장 조선스러운 세종 정신과 훈민정음은 외면했다.
실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 하여 학문은 실질적인 이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문 분야에서는 한문으로 표현된 학문의 한계를 드러냈다. 실학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하여 편리와 복지 생활 추구했다. 그러나 편리와 복지를 위한 소통과 지식 나눔 외면했다. 정약용은 실사구시를 적용한 아동용 문자 교육서 ‘아학편’을 펴냈다. 그러나 실사구시 그 자체인 한글 교육은 고려 않았다.
실학은 애민, 존민 사상에 투철했다. 그러나 표현과 소통 주체로서의 애민, 존민은 살피지 못했다. 실학은 서구의 과학, 종교 등의 일부 지식 수용했으나 정약전과 같이 소통과 나눔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남긴 한글 문헌으로 1779년 무렵 천주교인들 사이에 소통했다.
십계명가_
세 션비님네 이아니 우수운가
평성의 므슨귀신 그리노
아침저녁 죵일토록 례 쥬문외고
잇돈 귀재물 던져주고 바태주고
쟈 힌신언동 각긔귀신 모셔봐도
허망다 마귀미신 우고 드라
허위허레 마귀미신 밋지말고 턴쥬밋세.
3. 역사는 현실이요 미래다
한문은 학문의 주요 도구, 성리학 학습과 계승의 주요 도구이자 표상이다. 조선은 한문이라는 동아시아 보편 문자를 통해 성리학의 시야는 넓혔으나 그것은 특권 문자(한자)를 중심으로 한 시야였다. 실학 시대조차 그런 특권 문자를 통해 실용적・통섭적 문학과 실학을 추구한 박지원과 정약용의 한계였으며 그런 한계가 고종 때 개화파에게까지 이어지게 된다.
세종의 르네상스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조선의 최대 비극이었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로 인한 피해 너무도 참혹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학자들의 한글 무시는 실학자로서의 직무유기였다. 정약용이 많은 사대부들이 남긴 언문 편지조차 쓰지 않은 것은 그의 사상과 실학자로서의 위대함으로 볼 때 설명이 불가능하다. 개인 취향의 문제로 보기에는 정약용의 사회적, 역사적 위치는 매우 크다.
한글은 단지 민족주의 차원의 문자 문제가 아닌 지식과 소통과 나눔과 사람의 문제이다. 정약용이 한글을 쓰지 않은 것은 신분제 모순과 인간 차별에 대한 인식을 문자와 소통의 문제로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된다면,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을 다 양반으로 만들고 싶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 존귀한 사람으로 된다면, 이는 곧 (지금의) 어떤 존귀한 사람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_여유당전서 1집 권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