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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종로 시장 상인들 한글로 권력을 비판하다

한글 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1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장소
조선 성종 임금이 다스리던 1485년(성종 16년)에 한글 관련 큰 사건이 벌어졌다. 종로 시장 상인들 가운데 한글을 아는 이들이 오늘날 장관격인 호조 판서 이덕량의 동생 집에 한글로 그들을 비판하는 투서를 몰래 전달했다. 영의정부터 판서까지 고위 관리들이 종로의 도로 정비 사업을 한다며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내용이었다. 이덕량은 그것을 읽고 곧바로 성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성종은 판내시부사 안중경과 한성부 평시서 제조 등을 보내 상인들의 요구 사항을 듣게 했지만 끝내 한글을 아는 자들을 처벌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하층민에 속한 상인들도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종로는 1호선인 종로 2가역, 3가역이 있는 서울의 중심지다. 종로 3가는 3호선과 5호선도 서는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조선 시대 때도 전국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이 있었던 자리다. 서울시는 옛날 시장터에 시전행랑을 복원해 놓았다.


사건 연보
1485/07/17(성종 16) : 호조 판서 이덕량 등이 시장 사람들의 언문 투서(익명서) 두 장을 바치다
1485/08/02(성종 16) : 임금이 불량한 무리들이 재상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익명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다  
1485/09/21(성종 16) : 언문 투서(익명서)로 의금부에 갇힌 사람 가운데 언문을 해석할 수 있는 16 명을 빼고 나머지를 풀어 주도록 하다
1485/11/09(성종 16) : 시장 사람들이 언문으로 호조 당상을 욕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인물
성종은 1457년(세조 3)에 태어나 1494(성종 25)년에 죽은 조선 제9대 임금이다. 3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종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영특해 유교 이론, 역사, 음악 등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종ㆍ세조가 이룩한 치적을 기반으로 하여 문화정책을 펴나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다.


성종은 책 펴내는 데도 힘을 써서 다양한 책들을 편찬ㆍ간행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책들은 현대에도 큰 의의를 지닌 책들이고 또 세종이 이룩한 치적을 바탕으로 문화정책을 펼쳤기에 언어생활, 특히 훈민정음과 관련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종의 이름은 혈(娎)이고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미처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조의 첫째 아들)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다. 13살 어린 시절인 1469년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이자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대비로부터 7년간 수렴청정을 받지만 세종을 모범으로 삼아 성군으로 자라나 1945년(성종 16년)에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등 훌륭한 정치를 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7살 때 12살 많은 윤씨와의 혼인이 잘못 돼 23살 때 윤씨를 페비시킴으로써 폐비 사이에 난 연산군이 한글을 탄압하는 폭군이 되는 비극을 만들게 된다.


역사는 임금만이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세종이 한글을 반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와 성종이 한글을 널리 폄으로써 이제 한자 모르는 사람들도 비록 하층민으로서의 신분은 변함이 없으나 당당하게 글자를 아는 민중으로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성종은 백성들의 교화를 중시 생각했으며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소 실천하여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임금이 된 지 2년 되던 해 한글을 즐겨 쓰던 할머니 정희대비와 함께. 삼강행실을 한글로 옮긴 책을 한성부와 모든 도의 여러 고을에 널리 알려 양반 사대부들을 비롯하여 시골 사람들까지 한글 윤리 책을 읽고 각각 깨닫고 살피는 마음을 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성종 때의 백성들은 임금의 명을 직접 언문으로 볼 수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궁벽한 곳에 사는 작은 백성들까지 언문을 알 수 있었고 언문을 통해 말글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건
성종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16년이 되던 1485년 7월 무렵 성종은 호조판서 이덕량, 호조참판 김승겸에게 명하여 한양의 시장 배치를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사가 잘 되던 철물전 가게 주인들과 명주전 가게 주인들을 비롯해 조건이 불리해지는 상인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급기야 시끄러운 사회문제로 번졌다. 호조에서는 시장 상인들의 의견도 청취하고 나름 노력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불만을 참지 못한 일부 상인들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한글로 써서 판서 동생 집에  몰래 투척했다.


“영의정부터 판서까지 너희 고위 관리들은 종로의 도로 정비 사업을 핑계로 시장을 옮긴다면서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들을 이리도 괴롭히고 있다. 호조판서 이덕량 너는 네 아들의 잇속을 위하는 것이 아니더냐. 호조참판 김승겸 너는 뇌물을 받은 게 분명하고 윤필상 대감은 재산을 늘리려 그리 한 것 아니더냐. 당장 멈추지 않으면 우리 상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윤필상 대감은 물러나겠다고 까지 했다.


영의정 윤필상이 와서 아뢰기를,
“신은 재능이 없는 몸으로 수상의 자리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근일에 이미 홍문관과 대간의 논박을 당하였고, 이어 또 시정 사람들의 입에서도 논의가 비등하여 뭇사람의 말이 아울러 일어나고 있으니. 뜻밖의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빌건대 속히 신을 해직하여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경을 의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번거롭게 재삼 사양하고 피하는가? 여러 재상들이 다 이자를 늘리고 있는데, 경만 어찌 유독 의심하는가? 홍문관이 올린 소(疏)는 내가 믿지 않는 바이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감히 죄를 다스리지 못할 뿐이다. 시정의 무리는 무지함이 심한 자들이라서 사람으로 대우할 수 없는데, 경은 또 무엇을 으심하는가?”
하였다.                      _〈조선왕조실록〉성종 16년(1485) 7월 21일


성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성종도 이때는 재상들의 편을 들었다. 재상을 비방하고 헐뜯은 것은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나쁜 풍조이며 임금을 욕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 것이다.


“저자 사람들이 재상을 비방하고 헐뜯었다 하니,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이와 같은데, 국가의 기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익명서의 예가 아니므로, 끝까지 힐문하면 죄인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 그 앞서서 외친 자는 마땅히 통렬하게 징계하도록 하겠다. 백성들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니, 경 등은 이것을 가지고 의심하여 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덕량 등이 아뢰기를,
“철물전과 면주전 사람이 저자 옮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니, 마땅히 먼저 이 두 전에 나와 장사하는 사람들을 국문하여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금부로 하여금 속히 붙잡아서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이 일에 관련되어 갇힌 자가 79명이나 되었다.
                  _〈조선왕조실록〉성종 16년(1485) 7월 17일


이를 가만히 두면 비슷한 사건이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므로 관련된 자들을 엄중하게 다스리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의금부에서는 주동자를 찾아내느라 무작위로 상인들을 잡아들이니 무려 150명이 넘는 백성이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 무려 79명이나 옥에 갇혔다. 7월 중순 한참 더울 때였다.


감옥마다 붙들려 온 백성들이 넘쳐 나서 다 수용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일부 신하들은 사건을 다루는 과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상소까지 올리게 된다.


성종은 수사 보고를 받고 매우 화가 났다. “막돼먹은 무리들이 언문으로 쓴 글을 몰래 보내어 재상들을 더러운 말로 욕한 것은 풍기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는 바로 저자거리의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감정을 품고 분풀이로 한 짓인 만큼 근거 없이 무턱대고 신문하는 것과는 견줄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몇 년이 걸려서라도 반드시 진상을 알아내고야말 것이다.” 8월쯤 이런 명령을 내리고 9월쯤에는 수사 범위를 좁혀 이는 한글 투서 내용으로 보아 한글을 아는 자가 주동했음에 틀림없다고 보았다.


마침내 옥사의 규모를 줄이고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잡혀 온 상인들 중에 언문을 아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백성들은 석방하기에 이른다.


전교하기를,
“의금부에 갇힌 사람 가운데 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민시 • 나손 • 심계동 • 유종생 등 16인의 같은 당류를 빼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 주도록 하라.”
                     _<조선왕조실록〉성종 16년(1485) 9월 21일


한글을 아는 자들만 잡아 국문하고 나머지는 풀어 주라. 이리하여 한글을 아는 민시, 라손, 심계동, 류종생 등 패거리 16명이 구속되었으니 이때가 9월 무렵이었다.


이때는 상인은 농민보다 낮은 하층민이었으니 한글이 이런 하층민들 사이에 꽤 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처럼 한글 보급에 큰 공을 남기고 백성을 위한 많은 정책을 편 성군이었다. 그 덕에 한글이 저항의 도구도 되었는데 성종 역시 이번 사건에서는 백성 편에 서기보다는 지배층, 양반 사대부들 편에 선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지배층 위주의 나라 기강을 위해 이렇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투서 사건은 이미 한글이 반포된 지 3년만인 1449년에 어떤 사람이 “하정승(하연)아, 나랏일을 어지럽게 망치지 마라.”라고 비판한 한글 벽서를 쓴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하다. 그 한글 벽서는 남아 있지 않으며 한문 번역만 전한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1449년 10월 5일자에 기록된 왼쪽의 한문 번역 내용을 그 당시 한글로 재현한 것이다.



 

이렇게 한글은 양반들은 배척하거나 한자 다음의 이류 문자 취급을 했지만 하층민들과 여성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퍼져 나가 사회를 바꾸는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