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원장 소강춘, 이하 국어원)은 ‘로컬택트’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지역 울타리 활동’을 선정했다. ‘로컬택트’는 지역이나 마을 공동체 단위로 관계를 형성하며 소통, 활동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사물 인터넷(IoT) 및 정보 통신 기술(ICT)을 신호등이나 가로등과 같은 기둥 모양의 도로 시설물에 접목하여 본래 기능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하는 시설물을 뜻하는 ‘스마트 폴’은 ‘지능형 기둥’으로, 주제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연결하여 그 속성을 나타내는 방법을 뜻하는 ‘버블 맵’은 ‘주제 그물’로 제시했다. 문체부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하나로 국어원과 함께 외국어 새말 바꿈말 제공 체계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문체부와 국어원은 지난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새말모임*을 통해 제안된 의견을 바탕으로 의미의 적절성과 활용성 등을 다각으로 검토해 ‘로컬택트’의 대체어로 ‘지역 울타리 활동’을 꼽았다. * 새말모임: 어려운 외국어 새말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바꿈말을 제공하기 위해 국어 전문가 외에 외국어, 교육, 홍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높이 12m나 되는 이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어서 백탑(白塔)이라는 별명이 생겼지요. 정조 때 이 탑골 주변의 지식인들이 모여 ‘백탑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ㆍ홍대용과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正祖) 시대인 1776~1800년간 힘을 얻었던 백탑파(白塔派) 선비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며 이들은 또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實學者)들이지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이 그들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특히 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이면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위는 1894년 오늘(10월 19일) 태어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펴낸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있는 말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2년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펴냈는데 이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광복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지요.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蕭蕭落木聲(소소락목성)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에 錯認爲疎雨(착인위소우) 성근 비라고 생각했네 呼僧出門看(호승출문간) 동자승 불러 문을 나가 보게 했더니 月掛溪南樹(월괘계남수) 달이 시내 남쪽 나무에 걸려 있다고 하네 밖에서 스산한 소리가 난다. 동자승을 불러 혹시 비가 오는지 나가보라고 한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동자승이 하는 말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쓸쓸한 나뭇잎 지는 소리를 비가 오는 소리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동자승이 한 말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다. 나무 가지 사이로 살짝이 고개를 내미는 달, 그러니 비가 올 리가 없지. 이 시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의 ”산사야음(山寺夜吟)“라는 제목의 한시다. 여기서 시는 쓸쓸한 나뭇잎 지는 소리로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네 삶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이렷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몸에는 점차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까맣던 머리는 희끗희끗 새치가 많아지고, 윤택하던 피부는 잔주름과 함께 거칠어지고, 어디 그뿐이랴. 젊었을 때와 달리 조금만 운동하면 숨이 차고 헐떡이기까지 한다. 그걸 보며 머리는 염색하고, 얼굴의 잔주름 펴 젊게 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글 반포 574돌을 맞아 일제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한글을 지켜낸 석인 정태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큰사전》 복원 행사가 파주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에서 10월 9일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전쟁 시기 활판인쇄공들을 비롯해 구순에 가까운 원로 인쇄장인들이 참여해 주조기로 다시 금속활자를 만들고, 문선 조판해서 《큰사전》 일부를 복원하는 실력을 과시했다. 정태진 선생은 경기 파주시 교하군(현 금촌2동)에서 태어나 조선어학회 사건의 첫 번째 구속자로 가장 오랫동안 고문당하고 해방 한 달 전에 출감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다. 해방 후에도 모든 영예를 뿌리치고 일제 탄압으로 중단한 《조선말 큰사전》 펴냄 작업에 매진했다. “말과 글은 민족의 피요, 생명이니 목숨을 걸고 우리말을 지키자.”라는 어록을 남긴 그는 6·25전쟁 와중에도 사전 작업을 이어갔다. 정태진 선생은 6·25전쟁 중 《조선말 큰사전》 4권을 편찬하고 조판까지 마쳤지만, 인쇄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52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정태진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은 그의 고향인 파주출판도시에서 당시 《큰사전》 제작 방식과 동일한 활판인쇄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숙종의 제2계비로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5)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원왕후는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이 지정한 무형문화재 가운데는 북한 쪽에서 전승되던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도 있지요. 이 사자놀음을 농경사회에서는 정월대보름에 놀았지만, 요즘은 때와 상관없이 놉니다. 또 이 놀음은 집안과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계통의 놀이였습니다. 특히 이 사자놀음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됨을 비손하면서, 춤과 노래로 흥과 신명을 돋우고 새로운 기분으로 활력을 되찾기 위한 민속놀이였지요. 사자놀음은 먼저 사람들이 모여 마당놀이를 하고 사당춤, 무동춤, 꼽추춤 따위로 한바탕 놀면 사자가 등장하여 사자춤을 춥니다. 사자가 한참을 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처음에는 스님을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사자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원을 불러 침을 놓는데 이에 사자가 기운 차리고 일어나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사자를 놀리기도 합니다. 놀이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들이 나옵니다. 또 이 북청사자놀음에는 퉁소, 북, 징, 장구가 쓰이는데, 특히 다른 지역과 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시: 2020.10.13.(화) ~ 2021.3.7.(일) 장소: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대상: 《쇄미록》(보물 제1096호)’ 등 52점(보물 4건 18점 포함) 내용: 《쇄미록》의 역사 및 내용 - 16세기 임진왜란을 겪은 한양 양반 오희문의 기록과 일상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최영창)은 10월 13일부터 2021년 3월 7일까지 특별전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를 연다. 조선 중기의 양반 지식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임진왜란(1592~1598)을 몸소 겪으며 9년 3개월(1591.11.27.~1601.2.27.)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그 일기, 《쇄미록》을 집중 조명한 이번 특별전은 7년 전쟁의 참상과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지속한 인간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자리이다. 코로나19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2020년 가을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번 특별전은 국립진주박물관이 지난 2018년 새롭게 역주한 《쇄미록》(전 8권ㆍ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을 계기로 기획되었다. 미증유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흔히 한국 신문만화의 처음을 말할 때 1909년 6월 2일 치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한 컷 만화를 꼽습니다. 다만, 이는 만화라기보다는 만평에 가까운데 어쨌든 한국 신문만화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꼽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한국 신문 첫 넷 컷 연재만화는 1924년 10월 13일 치부터 시작한 조선일보 '멍텅구리 헛물켜기'입니다. 한량과 기생의 연예행각을 그린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의 만화 '메기와 지그스'에서 착안한 명랑만화였는데 주인공 최멍텅과 친구 윤바람, 그리고 미모의 기생 신옥매 연애행각을 그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림은 나중에 동양화의 대가로 꼽히는 노수현이 그렸고 줄거리는 '조선일보' 편집고문 이상협과 주필 안재홍이 꾸몄습니다. 이후 '멍텅구리 련애생활', '명텅구리 가뎡생활', '멍텅구리 세계일주' 등 시리즈로 연재되며 2년 5개월 동안 모두 501회나 연재되다 1927년 3월 11일 마지막 만화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문제연구소’의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를 보면 노수현은 일제강점기 동양화단의 손꼽히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66년 9월 6일 낮 2시쯤 경주 불국사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공사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여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습니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확인한 결과 석가탑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기는 등의 이상을 밝혔지만, 상처가 생긴 확실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였지요. 이후 불국사의 석가탑 훼손 사항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황수영 동국대 교수는 현지조사를 마친 뒤 훼손의 원인은 사리장치를 노린 탑도둑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9월 30일에 열린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석가탑 복원을 위한 해체작업을 진행하던 중 10월 13일 낮 불의의 사고가 발생합니다. 2개의 받침 전주 가운데 하나가 부러져서 도르래로 2m 높이로 들어올린 2층 옥개석이 먼저 땅에 내려놓은 3층 탑신 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 사고로 3층 탑신은 세 동강이 났고, 기단부 갑석 일부와 2층 옥개석의 받침 일부가 손바닥 크기로 조각났지요. 이렇게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 사고는 뜻밖에 큰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석가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