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2‧12와 광주민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언론과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들었다. 주요기업 그룹 계열사 166개를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시책을 발표하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정주영이 아니었다.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반발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 책임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을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두환 '국보위'에 당당하게 맞서 업무 지시 전 꼼꼼하게 사전 준비 그뿐이 아니었다. 정주영이 국보위가 마련한 구조조정안에 반대하자 국보위측은 국책에 대항하느냐며 다그치자 이에 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당당한 대응논리를 폈다. 나는 어떤 사업이든 땅을 준비하는 데서부터, 말뚝 박고 길 닦아서 그 위에 내 공장을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만든 사업체를 어려워서 넘겼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프리미엄을 받고 누구한테 넘겨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은 하나하나 전부가 다 자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요즘 근현대박물관에 가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교실이 보이고 책상과 걸상, 칠판과 석탄난로는 물론 교복 그리고 주판이 보입니다. "432원이요, 578원이요, 933원요, 721원이면?" 예전 학교 교실이나 주산학원에서 낭랑하게 들려오던 선생님의 목소리입니다. 주판을 보면서 그때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 추억의 주판과 주산 문제집 고대문명의 발생지인 이집트에서 일찍이 주판 같은 계산도구를 썼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쓰던 주판 “애버커스(abacus)”는 대리석 판에 홈을 내서 작은 구슬을 늘어놓은 형태였다고 하지요. 그 뒤 실크로드를 타고 애버커스가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중국인들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만든 ‘죽산’이란 것을 계산도구로 사용했는데, 죽산의 대나무 살에 구슬을 꿰어 ‘주판(珠板) 또는 산반(算板)’이라 불리는 중국식 주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애버커스와 달리 계산을 하다가 떨어뜨려도 구슬이 쏟아질 염려가 없었던 중국인들의 슬기로움이었습니다. 중국의 주판은 5진법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위 칸에는 구슬 2 개를 놓고, 아래 칸에는 5개를 놓았는데 위 칸의 구슬 하나는 아래 칸의 구슬 5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진왜란 이후 조정의 곳간은 텅 비었습니다. 심지어 함경도 변경지대의 군사들에게 지급되어야할 동복조차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변방의 군사들에게 동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국방에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사의 사무를 담당하던 관아인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고민 끝에 과거시험 낙방자 답안지를 활용하여 동복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한지로 만든 옷은 방한복 구실을 톡톡히 했던 것입니다. ▲ 한지로 만든 드레스 (원주한지축제에서) 그래서 비변사는 낙방자 답안지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시행하는 중앙과 지방의 시험담당관 앞으로 공문을 보내게 됩니다. 공문의 내용에는 “낙방자의 답안지를 철저히 모아 보관할 것, 낙방자의 수와 거둔 답안지의 수가 다를 경우 시험관을 부정한 벼슬아치로 벌을 줄 것.”이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이 공문을 받아본 시험관들은 발끈하여 임금에게 항의편지를 보냅니다. “시험 관리도 어려운데 낙방자의 답안지를 모으는 일까지 더해지고, 답안지의 수가 혹 틀리기라도 하면 부정한 벼슬아치라는 누명까지 쓰게 되니 누가 시험관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시험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토종으로 천연기념물이 된 개들을 아십니까? 먼저 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돗개, 천연기념물 제368호 삽살개, 천연기념물 제540호 동경이가 있으며, 북한의 천연기념물 368호 풍산개도 있지요. 그 가운데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동경이를 소개하겠습니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동경이를 살펴보면 먼저 1845년(헌종 11) 나온 경주의 지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꼬리 짧은 개를 ‘동경구(東京狗)’라 한다.”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9세기 중엽)》에 “동경구는 꼬리가 짧아 장자구(獐子狗, 노루새끼개) 또는 녹미구(鹿尾狗, 사슴꼬리개)라 한다.”는 기록이 보이지요. 또 우리나라의 상고로부터 대한제국 말기까지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에는 “동경의 지형이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는 형상인 까닭에 그곳에서 태어난 개도 꼬리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속언으로 꼬리가 없는 개를 동경개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호랑이 무늬의 호고(왼쪽)와 백구, 둘 다 동경이다.(경주시청 제공)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신사에서 볼 수 있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국가 수요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 곧 육의전(六矣廛)이 종로에 있었습니다. 그 육의전은 크게 지전(紙廛 지물포), 포전(布廛, 주로 베를 파는 가게), 어물전(魚物廛), 선전(線廛, 비단가게), 면주전(綿紬廛, 명주가게), 면포전(綿布廛, 주로 흰 무명만 다룸) 따위가 있었지요. 그런데 조선 정조 때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자세히 적은 부지(府誌) 《한경지략(漢京지略)》란 책에 보면 “혜전(鞋廛)”이란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 신발창은 징신과 같이 촘촘히 징을 박은 것으로 정3품 이상의 당상관만 신었던 놋갖신 “혜전(鞋廛)”은 주로 가죽신을 파는 가게인데 이전(履廛)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혜전에는 나막신을 팔던 “목혜전(木鞋廛)”, 미투리나 짚신을 팔던 “승혜전(繩鞋廛 草鞋廛)”도 있었는데 이 혜전은 곳곳에 가게가 있었지만 혜전 가운데에서도 가장 비싼 놋갖신(油釘鞋)은 종루전(鍾樓廛)에서만 팔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놋갖신은 한자말로 ‘협금혜(挾金鞋)’라고했는데 태사혜와 비슷하고 신발창은 징신과 같이 촘촘히 징을 박은 것으로 정3품 이상의 당상관만 신었던 것입니다. 참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목탁을 사서 살며시 두드려 보았어요. 맑디 맑은 그 소리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어요. 그 울림에 내 지친 영혼이 공명하여 파르르 떨었어요. 그래서 펑펑 눈물이 났어요. ▲ 뛰어난 울림(공명)으로 그 소리가 깊고 그윽한 이창홍 명인의 목탁 한 블로그에 오른 목탁에 관한 아름다운 시다. 불교에서 독경(讀經)이나 염불을 욀 때 쓰는 불구(佛具} 목탁(木鐸). 《두산백과사전》에는 나무를 큰 방울 모양으로 깎아 그 중앙을 반쯤 자르고, 소리가 잘 울리도록 다시 그 속을 파서 비게 하여 조그마한 나무채로 두드리게 되어 있다. 본래는 수도승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뜻에서 밤이고 낮이고 눈을 감는 일이 없는 물고기를 본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같은 연유에서 목어(木魚)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몸통은 금속, 추(錘)는 나무로 된 커다란 요령(搖鈴)을 목탁이라고도 한다. 목탁을 만드는 재료는 대추나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박달나무와 은행나무도 많이 사용된다. 또한 목탁의 유래를 중국 노(魯)나라 때 문사(文事)나 또 새로운 법령을 발할 때에 목탁을 울려 사람을 모이게 한 데서, 사회의 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도한다는 뜻이 담겨졌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어제는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이었습니다. 소설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의 경우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벌써 충청과 전라 서해안 지역에 대설답게 눈이 많이 내려 농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창덕궁 서설(그림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時維仲冬爲暢月)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大雪冬至是二節)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六候虎交角解)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不鳴蚓結)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乃挺出水泉動)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 ……(아래 줄임)…… 위 시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각각 7언 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19세기 중엽 소당(嘯堂)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입니다. 이때는 한겨울로 농한기이고 가을에 거둔 풍성한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인에게 붉은색은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색깔로 그다지 유쾌한 이미지는 아니다. 하물며 소련 국기에 그려진 낫과 망치, 그리고 바탕색의 붉은 빛은 섬뜩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 때는 1989년 1월 12일 정주영 회장은 소련으로 날아가 소련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 10시 무렵 일행은 크렘린궁의 맞은편 소련연방 상공회의소 뒤편 고르바초프가 업무를 보는 왼쪽 건물로 갔다. 그곳에서 정주영이 이날 만날 사람은 동방학연구소 소장 프리마코프였다. 그는 소련 KGB의 대외 총책과 러시아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낸 사람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프롤레타리아 정주영입니다. 간단히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마자 상기된 얼굴의 정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말이었다. 이때 통역은 작가인 겐나지 리였는데 정주영의 첫말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한국에서 가장 부자인 것으로 알려진 정 회장이 프롤레타리아라니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경제학사전에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찾아보면 생산수단의 소유비소유의 관점에서 유산계급에 대비하여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계급을 말한다라고 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역시 유창 명창이었다. 올 들어 가장 추운날일 어제 송서율창이 울려 퍼진 국립극장 공연장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유창(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1호 송서율창 예능보유자) 명창은 5일(금) 저녁 7시30분,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글의 울림, 소리의 울림, 삶의 울림이란 주제로 송서율창의 뜨거운 한판 소리마당을 열었다. 송서율창(誦書, 律唱)이란 선비들이 일정한 음률로 한문이나 소설 등을 읽는 행위에 음악적 가락을 붙이고 멋을 넣어 구성진 음악으로 표현한 전통예술이다. 중년의 한국인이라면 이은주, 묵계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꾼에게 사사 받은 유창 명창의 이날 공연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명예보유자인 이은주 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특별출연하여 청중들의 큰 손뼉 세례를 받았다. 스승과 함께한 유창 명창의 정선아리랑과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은 청중들로부터 연신 재청을 받았다. ▲ 스승 이은주 명창과 제자 유창 명창의 다정한 민요 한마당 ▲ 영풍, 적벽부를 부르는 유창 명창 공연 중간에 특별 출연한 스승 이은주 명창과 유창 명창의 무대는 입추의 여지없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는 누정문화(樓亭文化)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누정(樓亭)”이란 일반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樓)·정(亭)·당(堂)·전(殿)·각(閣)·원(院) 따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누(樓)는 지붕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전쟁에 대비하여 성문 위에 만들고 멀리 까지 관측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성루가 그 처음입니다. 그런가하면 정(亭)은 사람들이 여행하거나 이동하는 가운데 쉬기 위해 모이는 곳이지요. 또 당(堂)은 건물의 반 이상이 비어있어 학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며, 전(殿)은 임금이 거처하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고, 각(閣)은 형태상으로는 2층집을 말하나 1층집이라도 공공기관이 사용하지만, 임금이나 부처님보다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밖에 원(院)은 학교나 관청, 그리고 종교적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서원(書院), 사원(寺院), 도원(道院) 따위입니다. ▲ 남원 광한루(왼쪽), 창덕궁 애련정 그 가운데서도 특히 누각과 정자가 “누정”의 대표라 할 만합니다. 누정이 들어서는 곳을 보면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이지요. 뒤편은 산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