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대란치마”는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여성이 적의(翟衣, 왕비와 왕세자빈을 비롯하여, 왕대비나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 적통의 여성 배우자들이 착용하는 법복(法服)나 원삼(圓衫, 조선시대 때 부녀자들이 입던 예복) 따위 예복 차림을 할 때 아래옷으로 갖추어 입는 치마입니다. ▲ 왕비 등 궁중 여인들의 예복 대란치마 치마는 다홍이나 남색 비단으로 만들고 치마를 장식하기 위한 스란단은 두 층으로 붙이는데 윗 스란단 너비는 22-25cm, 아래 스란단 너비는 15~19cm입니다. 스란단에는 황후는 용무늬, 왕비나 왕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수(壽)"“복(富)"“남(男)"“다(多)" 따위의 글자나 석류불로초연꽃 등의 그림을 금실로 짜거나 금박을 놓습니다. 대란치마 말고 궁중 여인들의 옷으로 “스란치마”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평상시 당의를 입을 때 아래옷으로 갖추어 입는 치마입니다. 또 이 스란치마는 적의나 원삼 등의 예복 차림을 할 때 대란치마 안에 입는 옷이기도 한데 스란단은 대란치마와 달리 한단만 붙입니다. ▲ 스란단이 하나인 스란치마 요즘 혼인예식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서양에서 온 하얀 드레스를 입지만 전통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養蠶有何利 누에를 친들 무슨 이익 있으랴 不見身上衣 자기 몸엔 비단옷 입지 못하니 堪憐隣舍女 가엾어라 저 이웃집 아낙은 日日摘桑歸 날마다 뽕잎 따서 돌아오는구나. ▲ 누에치는 아낙 한시(漢詩)를 쓴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초상 위는 조선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문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 ~ 1609)가 쓴 잠부(蠶婦) 곧 누에치는 아낙이라는 제목의 한시(漢詩)입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던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사 뒤에는 왕비가 직점 뽕잎을 따는 모범을 보이는 국가의례 곧 “선잠제(先蠶祭)” 또는 친잠례(親蠶禮)를 했을 만큼 누에를 쳐서 옷감(비단, 견직물)을 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옷감을 짜는 여성들은 정작 비단옷을 입지 못하는데 이를 이산해는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뽕잎을 따고 누에를 쳐야 하는 아낙들이 안타까워 누에 치는 아낙의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산해의 시말고도 지은이를 모르는 또 다른 누에치는 아낙이라는 한시도 역시 같은 정서를 노래합니다. “어제는 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에는 역술인들이 앞 다퉈 '정도령'을 점지하고 나섰다. 동시에 각 선거캠프에서는 우리 후보가 정도령이다.고 말하기 바빴다. 최고의 예언서라는 정감록에는 정작 정도령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건만 이유가 어찌됐건 정도령을 차지하려고 서로들 무던 애를 썼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정주영 측도 성씨가 같다는 연유로 정주영이 정도령이라 했고, 이 말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정도령은 누구이며, 왜 서로들 정도령을 차지하려고 할까? 정도령은 예언서로 잘 알려진 《정감록(鄭鑑錄)》과 《격암유록(格菴遺錄)》에서 예언하고 있는 민족의 구원자다. 그가 정작 어떤 성씨를 가졌으며 언제 나타나 어떤 큰일을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까닭은 《정감록》과 《격암유록》이 온통 파자법(破字法, 여러 의미로 결합되어 있는 글자를 분해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법)으로 쓴 암호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그래서 수많은 정도령이 나오게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정주영은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외치며 1992년 12월 제14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개국을 찬양하는 노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44장에는 태조 이성계의 놀라운 격구(擊毬) 실력이 노래가사로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용비어천가>에도 나올 만큼 조선시대엔 격구가 귀족운동의 하나였지요. 또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무관이 되려면 과거시험 중 무과(武科)를 보아야 했는데 그 무과시험의 마지막 관문 곧 전시(殿試)의 끝 시험과목이 바로 격구일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격구를 못하면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무관이 될 수도 없었지요. 격구는 말을 타고 펼치는 공놀이의 일종으로 장시(杖匙)라는 끝이 숟가락처럼 생긴 채로 공을 퍼 담아 골대에 집어넣는 운동입니다. 조선시대 마상무예라 하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역시 말을 타고 달리며 창으로 공격하는 기창(騎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한 사람이 홀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뤄 함께 싸우는 단체전이므로 격구가 다른 무예보다도 전쟁 훈련에 가장 좋은 무예였지요. 격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먼저 한 사람이 일정한 길을 따라 여러가지 자세를 취하며 말을 달려 공을 골대에 넣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팀을 나눠 공을 서로 빼앗아 가며 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늙은 호박이 탐스런 계절입니다. 들녘 호박 밭에는 넝쿨마다 주렁주렁 달덩이만 한 누런 호박이 달려 있어 들판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지요. 늙은 호박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호박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이 붓는 것을 막아주는 호박은 칼슘, 아미노산 따위의 풍부한 영양이 들어 있는 식품으로 달콤한 호박죽은 가을 별미 가운데 별미로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박죽을 끓이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먼저 호박을 다듬어야하는데 씨를 발라내고 껍질을 얇게 깎거나 또는 긁은 뒤 듬성듬성하게 썰어 냄비에 담아 끓입니다. 처음엔 한번 팍 끓인뒤 뭉근한 불로 살이 뭉개질 정도로 삶아 둡니다. 약간 식혀 호박을 으깨거나 믹서로 간 뒤 여기에 불린 찹쌀 또는 콩, 팥 따위의 좋아하는 재료를 넣고 물을 넉넉히 잡아서 다시 끓이면 완성되는 것이라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간은 소금으로 약간 하지요. ▲ 늙은호박과 호박죽("감천골 작은 행복 이야기들" 블로그 제공) <동의보감>에 따르면 호박은 맛이 달며, 성분이 고르고, 독이 없으면서 오장을 아주 편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또한 노폐물을 쉽게 배설하는 작용을 돕고 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얼마 전까지 몽골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학교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최기호 교수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바로 외솔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는 최교수를 만나 어떻게 몽골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이 됐는지, 또 대학교 발전은 어떻게 이루었는지 따위를 자세히 듣는 시간을 가졌다.(기자 말) - 먼저 어떻게 몽골에 관심을 두게 됐는지 말씀해주십시오. ▲ 제36회 외솔상을 받는 최기호 전 울란바토르 총장 “저는 국어학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뿌리를 알려면 주변 나라의 말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우리와 얼굴 생김새도 여러가지 말도 비슷한 몽골말은 꼭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일본 동경외대에서 몽골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몽골에 간 것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가시게 되었나요? “사실 일본외대에서 몽골어를 공부했지만 그것으로는 몽골어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아 몽골에 가봐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 1990년에 몽골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서 비자를 받아 홍콩을 거쳐 베이징을 들려 몽골로 들어갔는데 굉장히 어렵게 들어갔어요. 북경발 몽골행 비행기는 에어컨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가 자에 기윽하면 각하고, 가자에 니은하면 간 하는 식으로 천자문을 외우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는 1925년 윤동주가 만 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야기를 동창생이자 외사촌동생인 김정우 씨(시인)가 들려주는 말입니다. 중국 용정의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만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의 생애 28년 동안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기 때문이지요. ▲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 졸업식 명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인데 동창생 김정우 씨가 병풍처럼 산이 에워싼 이 마을은 서북쪽에 3형제 바위가 서 있어서 서북풍을 막아준다. 봄이 오면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할미꽃, 방울꽃 들이 앞 다투어 피고 앞 개울가 버들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무릉도원이었다. 가을 단풍은 황금이요, 은색 찬란한 설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고 할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특히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노루 떼, 멧돼지 떼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곤 했다고 합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우리나라가 인쇄문화에 있어서 세계 으뜸임을 증명한 날입니다. 먼저 1966년 10월 14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체 공사 과정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현재 국보 1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좀벌레에 그 두루마리 일부가 침식되어 있었을 뿐 1,200년 동안 온전하게 보전되어 우리 한지의 우수성도 동시에 증명되었습니다.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70년에 새긴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보다 20년 정도 빠르고 868년에 목판을 만든 중국의 금강경보다 118년이나 빠른 것이지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는 석가탑에 세워진 이전으로 706년이나 그 이전으로 제작 연대를 소급할 수 있지만 최하한선으로 잡는다 해도 불국사를 세운 해인 751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그런가 하면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인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줄임말 직지)을 인쇄한 흥덕사터를 발굴한 날입니다. 직지에는 고려 우왕 3년(1377) 청주목 교외의 흥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고 붙이고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만든 결사조직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혹독한 고문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조선어사전까지 뺏어다가 사전을 편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조선어사전편찬은 장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일본말을 사용하는 시대에 한글을 연구 보급하려는 것은 조선문화의 향상과 민중 민족의식을 높여 종래는 조선독립을 꾀하려는 것이다” 위는 1942년 10월 10일 매일신보에 실린 “조선어학회사건의 진상 발표”에 나오는 기사의 일부입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한글 학자들이 잡혀 들어갔으며 함흥지방법원에서 16명이 공판을 받고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심한 고문으로 옥사를 당하고 맙니다. 한징(韓澄, 1886 ~ 1944)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1927년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사전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하였습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하셨지요. ▲ 옥중순국한 조선어학회사건의
[그린경제/얼레빗=감영조 기자]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해 22회에 걸쳐 그의 인생 전반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일화를 수없이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이 나중에 소 1000마리를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사건은 세기의 뉴스거리가 되었고, 20세기 봉이 김선달이라 할 정주영이 황량한 미포만 사진 한 장으로 조선소를 짓고 26만 톤 유조선을 만든 일화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하고 10층 빌딩만 한 구조물 89개를 인도양 건너 운반한 상상초월의 일이라든지, 23만 톤 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서산간척지를 완성하고 한반도 지도를 고친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망신만 당하지 말라던 올림픽 유치전에서 당당히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88올림픽을 따낸 일도 그의 진가를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가하면 위기를 극복한 오뚝이 일화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 정주영 회장이다. 어렵사리 차린 자동차수리공장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화재를 만나 빚더미에 올랐을 때도 그는 절망하거나 주저 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