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16년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올랐고, 2017년 5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심 1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ㆍ전복ㆍ미역ㆍ톳ㆍ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며, 가끔 작살로 물고기를 잡기도 하는 해녀는 전 세계에서 제주와 울릉도, 일본 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하지요. 이 해녀를 옛날에는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했는데 300년 전인 1702년의 그림에 잠녀의 모습이 있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가면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그린 기록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가 있는데 18세기 초 제주의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 41면 가운데 제주 용연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屛潭泛舟)’라는 그림에 바로 잠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병담범주’의 가운데 오른쪽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용두(龍頭, 용두암)라는 글자가 선명하고, 그 옆에 잠녀(潛女)라는 한자도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잠녀 다섯 5명이 테왁이라는 도구를 물 위에 띄워놓고 물질하는 모습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뚝이 가라사대 - 이 달 균 어허, 할 말 많은 세상, 그럴수록 더욱 입을 닫으시오. 조목조목 대꾸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니 침묵이 상수요 대신 이놈 말뚝이 잘난 놈 욕도 좀 하고 못난 놈 편에서 슬쩍 훈수도 두려 했는데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예에에. 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꺽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레 이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꼴뚝아 밭 가운데 쇠뚝아 오뉴월에 말뚝아 잔대뚝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 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이는 한국 전통탈춤의 하나인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과 말뚝이 춤>에서 양반이 말뚝이를 찾자 말뚝이가 양반들을 조롱하는 사설이다. 한국 탈춤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말하라면 당연히 말뚝이다. 말뚝이는 소외당하는 백성의 대변자로 나서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양반을 거침없이 비꼰다. 특히 말뚝이는 양반을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봉건 질서까지 신랄하게 비판해댄다. 그래서 양반들에게 고통받고도 울분을 배출할 데가 없던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말뚝이는 탈춤에서 신이 난다. 여기 이달균 시인은 그의 사설시조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이가 학업에 소홀하여 나무랐는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뒤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중략) 묵재가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방에 들어오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李文楗, 1494∼1547)이 쓴 《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문건은 손자를 가르치며,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렸습니다. 물론 지나친 감정의 체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때린 뒤 손자가 한참을 엎드려 울자 자신도 울고 싶은 마음뿐이라 고백합니다. 이문건은 장조카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손자를 가르침에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고 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문건이 쓴 또 다른 책 《묵재일기(默齋日記)》에 보면 손자가 6살 이전에는 어머니가 사는 안방에서 지냈지만 6살이 되면 자신의 거처에 오게 하여 항상 돌보며 가르쳤고, 이따금 밖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실에서 쓰던 도장으로는 국새와 어보가 있습니다. ‘국새는(國璽)’는 외교문서를 비롯한 각종 공공문서에 공적 목적으로 쓰였지요. 이와는 달리 ‘어보(御寶)’는 주로 존호(尊號,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과 시호(諡號,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품계를 높여주던 이름)를 올리는 등 궁중 의식을 치를 때 의례용으로 쓰던 도장입니다. 그런데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없어졌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보와 국새의 모양과 크기, 재료는 거의 비슷합니다. 어보의 높이는 대략 10센티미터, 무게는 2~7킬로그램 정도며, 재료로는 금ㆍ은ㆍ옥 등이 쓰입니다. 대부분 사각 몸체에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린 모습인데 거북 모양의 손잡이는 임금을 상징하고, 황제의 상징으로는 용이 쓰였습니다. 어보에 새긴 글자는 임금ㆍ왕비ㆍ세자ㆍ세자빈 등의 시호(추증한 이름)나 존호(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 휘호 등을 새겼는데 적게는 4자에서 많게는 100자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조선 왕실의 어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충청남도 부여에 가면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宮南池)’가 있습니다. 백제의 별궁 연못이며,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궁남지라 부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0여 리나 되는 긴 물길을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길과 물가ㆍ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못의 가운데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지요.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입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하는데,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리지요.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실(宗室) 원흥수(原興守) 이후(李煦)가 별감(別監) 김세명(金世鳴)을 만났는데, 김세명이 이후가 답례 절을 하지 않는다며 욕을 하므로, 후가 화를 내며 그의 입에다 오물을 집어넣고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뒤 김세명이 패거리 20여 명을 데리고 이후의 집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이후를 끌어내다 묶어 놓고 마구 때렸습니다. 이후의 형 이경(李炅)이 격고(擊鼓, 임금이 나들이할 때, 억울한 일을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별감 등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몰아서 쫓아내고 뺨을 때려 피가 났으며, 사모(紗帽)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위 내용은 《숙종실록》 38년(1712) 10월 20일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김세명은 액정서별감(掖庭署別監) 곧 궁궐 안에서 왕실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궐내 각 문의 문단속, 궐내 각종 행사 준비, 시설물관리, 청소ㆍ정돈 따위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고, 이후는 임금의 친족 곧 종친입니다. 액정서별감이 감히 종친을 두드려 팬 사건이지요. 물론 김세명은 처벌받았지만 이런 사건이 조선시대 내내 벌어집니다. 《순조실록》 16년 6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바지저고리 위에 겉옷을 걸치는데 이 겉옷으로 많이 입던 것에는 두루마기를 비롯하여, 도포와 중치막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기, 도포, 중치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 곧 깃은 곧고 섶은 겹치도록 옷을 여미는 방식이며, 양옆 겨드랑이에 무(옷감을 덧대 것)를 달고, 길이는 발목에서 20~25cm 정도 올라옵니다. 또 도포는 깃이 곧고 소매폭이 넓으며, 옷 뒷면에 옷자락이 하나 더 붙어 있어 터진 곳을 가려주며, 품도 넓으며 길이도 길어서 발목까지 미칩니다. 여기에 도포는 특이하게 세조대(細絛帶)라 하여 가느다란 띠를 대는데 대의 끝에 술을 달고 품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도포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이 입었는데, 관리들도 관청에 나아갈 때를 빼고 사사로이 입는 겉옷이었습니다. 중치막은 도포와 달리 양옆 겨드랑이 부분의 무가 없이 트여 있어 활동하기 편할 뿐만 아니라 소매 너비가 넓어 널리 입었던 옷입니다. 그 밖에 유학자가 평상복으로 입던 겉옷으로 백세포(白細布, 빛깔이 하햔 모시)로 만들며 깃ㆍ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이고, 내일은 전통 4대명절의 하나였던 한식이다. 이렇게 청명과 한식이 같은 날이거나 하루 차이여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날 성묘를 한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곧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청명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액 면 가 - 윤 준 경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 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육십 년이나 절었다 그래서 나의 액면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때로 누가 나에게 제값을 쳐주면 정색하며 다시 깎아내리곤 했다 자신의 액면가를 곧잘 높여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겉으로는 끄덕끄덕하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하다 그들의 액면가는 부르는 만큼 상종가를 치기도 하는데 나는 늘 나의 값을 바닥에서 치르며 흘끔흘끔 앞뒤를 곁눈질 한다 깎이고 깎인 액면가가 내가 되었다 이제라도 제값을 받아보자고 큰소리 한번 치고 싶은데 유통기한이 끝나간다 무릎이 저리다 조선시대만 해도 장수하는 사람이 드물어 임금이 직접 예순 살이 넘은 문신들에겐 양로연을 , 일흔 살이 넘은 사람에겐 기로연을 베풀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인이며 화가였던 강세황은 양로연에 참여할 나이인 예순 살이 되도록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한사(布衣寒士)였다. 하지만, 강세황은 보통 물러나 쉴 나이인 61살 노인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능참봉(왕릉을 지키는 벼슬)으로 시작하여 6년 만에 정2품 한성부판윤(현재 서울시장 격)에 오르는 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버버리 찰떡”은 일제강점기부터 경북 안동지역 사람들의 주요 간식이자 한 끼 대용식으로 사랑받아왔습니다. 제주에 오메기떡, 경주에 황남빵, 강원도 횡성에 안흥찐빵이 있다면 안동에는 “버버리 찰떡”이 있는 것이지요. 이 떡은 일제강점기 김노미 할머니가 지금은 사라진 안동시 안흥동 경북선 철길 밑에서 빚어 판 것을 시작으로 안동시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불황으로 가게 문을 닫은 뒤 한때 명맥이 끊어졌었지요. 그러다 종종 사 먹던 찰떡의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의 대표적 먹거리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김동순(76) 할머니를 찾아가 "안동의 자랑인 버버리 찰떡이 후대에 전수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권유하여 그때의 사라진 '버버리 찰떡' 맛을 되살렸다고 하지요.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 사투리입니다. 찰떡이 워낙 크고 맛이 좋아서 한 입 베어 물면 말을 잘할 수 없어 마치 벙어리처럼 된다고 해서 '버버리 찰떡'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지요. 이 떡은 떡고물을 떡 속에 넣지 않고 직사각형 모습의 찰떡 양쪽에 콩이나 팥고물을 듬뿍 묻힌 특이한 모양입니다. 버버리떡은 재료의 절반이 건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