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위 시는 김광섭 시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일부입니다. 1960년대 초반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성북동 산 일대는 막 주택 단지로 개발되던 때였기에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었는데 시는 이 시기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이 파괴되면서 거기에 깃들여 살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도 오갈 데 없이 쫓기는 새가 되고 가슴에 금이 가고 말았지요. 이 시는 삶의 터전인 자연의 품을 잃어버린 아픔을 일상어로 노래했기에 오래도록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광섭 시인은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 동안 교단에 섰는데, 이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ㆍ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엄마의 사랑법 - 박 혜 성 나만 보면 하시는 말씀 치매에 걸렸어도 요양원에서도 만날 때마다 하시는 말씀 밥 먹었나? 듣기만 해도 눈물 나는 사랑입니다. 농부 전희식 선생은 《똥꽃: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을 펴냈다. 선생은 언제나 어머니의 건강보다도 '존엄'을 더 귀하게 생각한다. 매일 집을 나설 때와 집에 들어올 때,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린다. 대소변을 못 가린다고 음식을 적게 주지도 않고, 거동이 불편하다고 마냥 누워만 계시라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주고, 어머니를 바보로 만드는 도시를 떠나, 어머니 원래의 영역인 산과 들로 모시고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극력 노동운동가였던 전희식 선생은 자신이 수배당해 숨어다닐 때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 치매 치료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귀농했다고 하는데 이후 어머니는 의사가 놀랄 정도로 회복되었단다. 그러면서 선생은 그런 치매 노인들이 꿈을 현실로 착각한다고 믿는다. 여기 박혜성 시인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 치매 노인들이 꿈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치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월이라 한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 비 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구나 /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농가월령가’ 4월령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즈음 정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입니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이지요. 또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습니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지요. 이때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소만 때는 겉으로 보기엔 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2월 18일 실물과 관련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있고 24m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갖춘 조선왕실의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를 국보 제335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를 를 기리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지요. ‘회맹제’는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행사입니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가운데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 1680년 4월 경신환국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칭호)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회맹제 거행 당시의 회맹문(會盟文) 곧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모두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에게는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 때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 때 사용하는 기구인 맷돌이 있습니다. 흔히 한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가리(구멍)에 곡식을 넣는데 맷돌이 크고 갈아야 할 곡물이 많을 때는 맷손잡이(매손)에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맷손을 걸고 두세 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뒤로 밀어가며 갈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맷돌은 중부와 남부 두 지방의 것이 다릅니다. 중부지방의 것은 위쪽 곧 암맷돌과 아래쪽 숫맷돌이 같고, 둥글넓적하여 맷돌을 앉히기가 좋은 매함지나 멍석을 깔고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의 것은 숫맷돌이 암맷돌보다 넓고 크며 한쪽에 주둥이까지 길게 달려서 매함지나 매판을 쓰지 않지요. 맷돌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여 작은 것은 지름 20㎝에서 큰 것은 1m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일반 맷돌보다 곱게 갈 수 있는 맷돌은 풀매라고 부릅니다. 맷돌에도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 숫맷돌은 고정하고 위의 암맷돌을 돌리는데 이때 원심력이 생기며, 이 원심력과 함께 달팽이 모양의 홈이 파인 암맷돌 밑 부분을 통해서 곡물이 바깥으로 쉽게 밀려 나가게 했지요. 또 둥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김주신의 딸은 숙종의 셋째 왕비인 인원왕후로 그가 한글로 쓴 《션균유사》에 "아버님은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근신하여 나막신의 앞부분만 보고 다녀 10년이나 아버지를 모신 나인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김주신은 겸손한 선비였습니다. 왕비가 된 딸에게 그렇게 부담을 지우지 않게 했을 뿐 아니라 김주신은 홀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자로도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겨 글공부에 전념하였지요.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자 김주신은 밤늦은 시간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었을 만큼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비석을 실어 나르던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너무 측은하여 그 뒤로부터는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할 만큼 인정이 넘치는 선비였지요. 또 김주신은 대자동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멀리 십리(4km) 정도 떨어진 송강고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달 28일 문화재청은 대구 팔거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에서 처음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조사 결과, 전체 11점 가운데 7점에서 글자가 보이고, 그 가운데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도 등장합니다. 특히 보리를 뜻하는 맥(麦)와 벼를 이르는 도(稻), 콩 곧대두(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산성에 물자가 집중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산성의 행정 또는 군사기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간(木簡)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대나무로 된 죽간(竹簡)과 함께 글자를 기록하려고 썼던 목편(木片) 곧 나무 조각입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목간은 지금까지 400여 점이 나왔습니다. 목간은 보통 나무를 너비 약 3cm, 길이 약 20∼50cm, 두께 3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먹으로 글을 썼지요. 그렇지만, 목간 가운데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남근 모양의 백제 목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간은 일본 목간 연구의 권위자인 히라카와 미나미 국립역사민족박물관 교수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할머니의 연등 - 유 봉 수 오늘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시골 작은 절집에도 이웃 사람들 모여 저마다의 연등을 받아 들고 절 마당 곳곳에 꽃등을 달고 있습니다.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구석진 해우소 쪽으로 들고 갑니다 “할머니! 제가 좋은 곳에 달아드릴게요 왜 하필 이 구석진 여기로 오셨어요?” “우리 스님이 어둡고 구석진 곳을 밝혀야 진짜 등불을 밝히는 것이라 말씀했어요.” 이제 다음 주 19일이면 불기 2565년 ‘부처님 오신날’이다. 그래서 곳곳에 연들이 달린다. 대낮에도 켜는 연등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자 함”이란다. 그런데 많은 이는 연등을 걸어놓고 소원을 빈다. 무엇을 빌었을까?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어에서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단지 불자(佛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우리 인류 모두가 함께할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는 그 지엄한 진리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뜻깊은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비록 힘드시더라도 모두가 환희로운 마음을 가득 담아 이웃과 함께 염화미소를 나누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혼자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폭이 세로 113.6cm, 가로 49.1cm인 8폭 병풍 <태평성시도>가 있습니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성시(城市) 곧 조선의 한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한 작품인데 모두 8폭의 화면에 2,120명 정도의 인물과 300여 마리의 동물 그리고 각종 그릇과 건물, 도로 등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속화입니다. 영ㆍ정조 시대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으로써 도시인들의 소비생활이 활발해졌고 저잣거리(시장)는 연희패 등의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따라서 그림 속 가게들은 고급스러운 마감재와 실내장식이 돋보이고 그 안에 옷, 푸성귀(채소), 고기, 생선, 건어물 등의 식생활용품과 빗, 장도, 담뱃대, 칼, 안경, 우산, 도자기 등의 기호품 그리고 서화, 서적, 지필묵 등의 문방구와 옹기, 광주리, 대자리 등의 생활용품 등이 가득하지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과 책을 파는 서점, 서화를 파는 서화전은 당시의 문화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때는 가게에 간판을 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신구)입니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습니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하지요.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지요. 노리개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차던 것입니다. 특히 대삼작은 옥나비, 밀화불수(密花佛手, 밀랍 느낌의 천연호박으로 만든 꾸미개), 산호가지, 은장도 따위로 꾸며 매우 화려하지요. 노리개는 띠돈, 끈목, 꾸미개, 매듭, 술의 5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띠돈(帶金)은 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달린 고리로서 노리개 전체를 옷끈에 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