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악극단(주요멤버 남인수, 김정구,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이화자 등)사진 ▲ 저고리 씨스터즈(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김능자, 이준희)사진 ▲ 여수야화 신문광고 (1949.7)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진정한 음악의 향수에 흠뻑 빠지고 싶을 때는 LP음반만큼 좋은 게 없다. 특히 지난 1920년대부터 1970년 때 발매된 음악들을 하나씩 들어본다면 분명 또 다른 새로운 맛일 테다. 퐁키(대표 김광우)는 한국의 유성기 음반과 LP 음반을 복각해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음악 감상 사이트 퐁키(www.ponki.kr)의 문을 열었다. 퐁키에는 한국가수 최초로 지난 1959년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김씨스터즈(김숙자김애자이민자)는 물론 걸그룹의 원조인 1940년 저고리 씨스터즈(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김능자, 이준희),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중국과 일본, 만주 등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았던 한류의 원조 조선악극단(남인수김정구고복수이난영장세정박향림이화자 등) 등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를 통으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고인이 된 옛 가수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복원해 들을 수 있으며 1920년대부터 발매된 판소리, 민요, 대중가요 등의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소리꾼인 수정심 박매자,(58)가 경기민요 음반 세상에 전하는 아름다운 경기소리(신나라뮤직)를 발표했다. ▲ 수정심 박매자 '세상에 전하는 아름다운 경기소리' 음반 표지(세화 엔터테인먼트 제공)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민요는 경기 지역의 수려한 자연과 함께 그 속에 녹아 있는 민중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 음악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남도ㆍ서도 민요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즐겨 불러온 전통 노래이다. 경기소리의 멋과 우수성을 널리 알려온 수정심 박매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로 명창 묵계월, 김혜란, 임정란에게서 배웠다. 지난 1990년 경기소리경창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이래 본격적으로 경기소리 연구와 전수에 매진해오고 있으며, 특히 지난 2008,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개루왕 때부터 전해오는 설화 도미부인을 경기소리극으로 각색해 최초 공연함으로써 경기소리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을 얻은 바 있다. ▲ 2011년 5월 27일 11월 경토리 발표회(문화재 전수회관) 인간문화재 묵계월 선생(가운데), 김영임 명창(오른쪽)과 함께 음반 세상에 전하는 아름다운 경기소리는 2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80년대 초,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에게는 마땅한 놀 공간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장소는 동네 빵집(큰 가마솥에 찐빵, 만두, 풀빵 등을 삶아 팔던 집)이 대부분이었고 좀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제과점 등에서 만나곤 했다. 그나마 생활지도를 나온 선생님에게 걸리는 날은 양아치나 날라리 취급을 받으며, 재수없으면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먼지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맞곤 했다. ▲ 추억의 롤라장 학생들에게 숨 쉴 공간조차 정해놓고 정해진 방식대로만 삶을 강요하던 시절.... 사람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으로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은 진절머리가 나는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1980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더구나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정치적인 격변과 도시문화의 충격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기를 살아야 했다. 너그러운 성격만큼이나 웃음 맑고 붓글씨를 잘 쓰던 어느 선배는 5월의 봄을 뒤로 하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길로 피 흘리며 사라져갔고, 정답던 선생님들 몇은 또 교단에서 쫓겨났다. 또한 거의 씨족의 구성원으로 형성된 촌에서 자라면서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
[그림경제=김호심 기자]1980년대는 73년과 79년의 2번의 오일쇼크의 후유증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경기가 호전되면서 사회의 분위기가 점점 좋아졌습니다. 먼저 장발단속 완화,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개방화 정책으로 국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한 군부정권은 이어서 컬러TV 방영과 프로야구, 프로씨름의 개막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오락과 스포츠, 섹스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가장 활발한 성업이 시작된 곳은 소위 유흥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심야다방과 가라오케 그리고 통행금지제도가 사라지면 모두 망해버릴 줄로만 알았던 여관이 오히려 자유로운 심야 활동과 함께 더욱 성업하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여주는 듯한 음반 표지 하지만 그들 모두 나이트클럽의 번성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정도였으니. 그동안 젊은이들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춤방은 무도장인 캬바레, 그리고 쇼를 보여주던 나이트클럽, 그리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던 입장식 디스코텍의 혼합 형태인 디스코 나이트가 등장함으로써 향유 연령대와 업태가 다양해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시대가 소비 지향적으로 급변하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기억하고 있습니까? 청춘 시절에 들은 그 그리운 멜로디! 이번엔 1960년경 미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교댄스 및 댄스리듬으로 대단히 빠른 기세로 세계적인 유행춤이 되었던 '트위스트' 입니다. 1950년대 맘보스타일의 붐 이래,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리듬의 개척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최대의 성공을 거둔 리듬은 1960년에 등장한 트위스트 붐일 것입니다. 양 다리를 약 30센치 정도의 간격으로 열어, 무릎을 가볍게 굽혀 히프를 금방 다른 곳으로 비틀어 움직이면서 있는 대로 록큰롤 리듬에 맞추고 허리를 흔드는 단순 명쾌한 댄스입니다. ▲ 음반에 등장한 트위스트의 매력, 60년대는 트위스트가 세상을 장악했다. 특히 1960년 리듬앤블루스 가수 처비 첵커(Chubby Checker)가 '더 트위스트'란 노래를 이런 몸짓으로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참고로 이는 식당의 종업원이었던 처비 체커가 삶은 감자를 밟아 비비면서 착안한 춤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서로 떨어진 채 자유롭게 손발을 흔들고 몸(어깨허리다리)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단순한 트위스트는 큰 유행이 되었으며, 이후 이 춤의 변형인 림보(limbo)와
[얼레빗=김호심 기자] 한 때 고고 춤이 유행하던 때에는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유행이어서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등산이라도 갈 때면 통기타나 야전(야외전축, 휴대용)은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 흔히 '야전'이라고 줄여 불렀던 '야외전축', 70년대는 이 야전에 속칭 '빽판'이라 불렀던 음반을 걸어놀고 고고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다. 야전에 '빽판(해적판)'을 걸어놓고 춤추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이 야외전축의 턴테이블에서는 한창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미국 밴드 C.C.R의 Hey Tonight, Molina 등을 연방 돌려 대는 시기였다. 60년대 트위스트가 젊은이들 음악 문화라고 이야기한다면 70년대는 바로 고고가 유행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내 고고의 대중적인 유행에 불을 댕긴 것 중 하나는 바로 야전이 아니었을까? 이 야외전축은 노트북 컴퓨터처럼 가방 모양을 하여 건전지로 작동하는 포터블(휴대용)로 가전제품으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8월17일 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꿈같은' 상품이었다. 크기는 보통 LP음반보다 조금 긴 장방형에다가 높이는 10Cm정도였다. Mono인 자체스피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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