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만약 당신의 14살 딸이 혼자서 몇 달 동안 전국을 유람하며 다닌다고 한다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뭐라고요? 학교 빠지고 유람하는 것을 누가 허락하겠냐고요? 아! 그렇지요. 학생이 몇 달 동안 학교 땡땡이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할 부모는 없겠군요. 그럼 방학 기간이라면 허락하겠습니까? 이 역시 허락하겠다고 선뜻 손을 들 부모는 많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여러 여건상 남자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조선 시대에 이렇게 혼자서 전국을 유람하며 다닌 14살 소녀가 있었습니다. 물론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시대라 남장을 하고 다녔지만요. 그 소녀는 바로 원주 출신의 금원 김씨(1817 ~ ?)입니다. 금원은 진사 시험에만 통과했을 뿐 계속 과거에서 미역국을 먹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집에 들어앉힌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금원은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면서 넓은 세상에 눈을 뜹니다. 그런 금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조선 여인의 운명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금원은 14살이 되어 이제 자신도 곧 부모님이 정해준 혼처를 따라가야 하는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그 운명에 묶이기 전에 집을 박차고 떠납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그저 감정적으로만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처럼 자료에 입각하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을 거쳐 이를 비판하는 책은 없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쓴 《개발 없는 개발》이 보이더군요. 당장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허 교수는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사는 침략, 수탈, 저항 등의 키워드로 뒤덮여왔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한 맞바람은 외국에서 왔습니다. 피티(Mark R. Peattie)가 ‘개발과 수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개발’이라는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개발의 측면을 부각시키지만 여전히 ‘수탈’에 방점이 찍혀 있었는데, 점점 더 ‘개발’에 비중을 드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바로 이런 학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허 교수는 일제 강점기 각종 경제통계를 훑어보면, 개발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 지배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조선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부당한 것이었다는 점도 명백하다고 합니다. 한편 개발론자들은 식민지 조선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하는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보았습니다. 지난번에 <아츠 앤 컬쳐> 전동수 발행인을 만났을 때 표를 주셨는데, 본다 본다 하다가 더 미룰 수 없는 지난 일요일 3시의 마지막 공연을 보았네요. 옹녀와 변강쇠에 대한 창극이니까 당연히 재미있을 거라 생각을 하였지만, 안 보면 후회할 뻔 하였습니다. 공연 도중 객석에서는 연신 폭소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옆에서 같이 보던 아내도 박수 대열에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환호의 함성까지 지르네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판소리 ‘변강쇠 타령’을 창극으로 무대에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판소리 변강쇠 타령은 지금은 실전(失傳)되어, 연출가 창작의 자유로움이 더해져 오히려 그것이 극의 재미를 더합니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는 판소리와 우리 고유의 음악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최희준의 <하숙생>도 들어가고, 클래식 <까르미나 부라나>도 들어갑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변강쇠전>이 아니고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일까요? 판소리에서는 변강쇠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오래간만에 아내와 함께 연극을 보러 세실극장으로 나들이 갔습니다. 연극 제목은 <달의 목소리>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리는 정정화 선생의 삶을 연극으로 꾸민 것입니다. 연극이 시작되니 배우 원영애가 무대로 나옵니다. 원영애는 정정화의 자서전 《녹두꽃》을 읽고 정정화에 꽂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8년부터 지금까지 연극으로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가 정정화를 알리는데 자기 연극 일생을 바쳐오고 있습니다. 해설자로 관객들과 소통하던 원영애는 곧 정정화가 되어 극중 세계로 빠져듭니다. 그러다가 다시 해설자로 돌아오고, 다시 극중 세계로 뛰어들고... 상대하는 배우들은 언제 나오나 했더니, 결국 연극은 배우 원영애가 혼자 이끌어가네요. 참!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1901~1991)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겠군요. 1919년 시아버지 김가진(1846~1922)과 남편 김의환(1900~1964)이 자신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상해로 망명하자, 다음 해 1월 정정화도 뒤따라 상해로 망명합니다.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은 구한말 농상공부 대신,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는데, 한일합방 후 일제는 동농을 회유하기 위해 남작의 작위를 줍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보통 법원에는 재판부마다 그 재판부가 전담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물론 전담한다고 하여 그런 사건만 하는 것은 아니고, 이를 위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1997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사단독 재판장을 할 때 저는 환경전담 재판부를 맡았습니다. 당시 저는 환경사범은 엄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제가 환경전담 재판부를 맡고 나서 그 전에 선고된 판결들을 보니 실형 선고한 판결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내가 맡은 이상 엄단하는 쪽으로 판결을 선고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환경전담 재판부를 맡고 나서 얼마 후, 검찰에서 환경사범을 일제단속 하여, 죄질이 중한 쪽은 구속기소하고, 가벼운 쪽은 약식기소, 그 중간 사건은 불구속 기소하였습니다. 사람이 구속되면 다급하니 변호사를 찾을 것 아닙니까? 사건을 상담한 변호사들은 종전에 실형 선고한 예가 별로 없고, 판결 선고 전에 보석으로 풀려난 예도 많아 석방시켜주겠다며 자신 있게 사건을 맡았겠지요. 그런데 저는 보석 신청 들어온 것을 모조리 기각했습니다. 선임된 변호사들은 아마 보석은 안 되었지만 집행유예는 틀림없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모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어떤 판사가 재판 잘 하는 판사일까요? 명쾌한 법논리를 통해 쾌도난마식으로 사건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판결하는 판사? 속전속결로 신속하게 재판하는 판사? 상급심에서 판결이 파기되지 않도록 요령있게 판결하는 판사? 물론 다 재판 잘 하는 판사에 들어가겠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꼽으라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판사가 재판 잘 하는 판사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일반국민들이 송사로 법정에 서는 일은 일생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사자들은 재판 결과도 중요하지만 법정에서 자기 얘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어하고, 또 판사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판사는 하루에 재판 한, 두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건을 들고 법정에 들어오기에 당사자들의 장황한 얘기를 다 들어주다간 다른 사건 재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개 당사자들의 얘기는 처음 얼마간 들으면 무슨 얘기하는지 다 파악할 수 있기에 조리 없이 중언부언하는 당사자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판사들이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사자의 얘기를 중간에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따봉’이란 포르투칼어 단어가 있습니다. ‘정말 좋다’는 뜻일 텐데, 아마 우리나라 국민이 제일 많이 아는 포루투칼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따봉’이란 단어가 우리나라에 유행하게 된 것이 1989년 롯데칠성음료의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 때문이지요. 당시 광고 화면에 브라질 오렌지 농장이 나오는데, 농장에서 오렌지 품질을 검사하던 남자가 ‘엄지 척’ 하면서 ‘따봉’이라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따봉’이 대유행하면서 사람들도 가게에서 ‘따봉주스’를 많이 찾았답니다. 그런데 정작 따봉주스가 없어 롯데칠성음료로서는 기껏 광고를 히트 치고도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뒤늦게 ‘따봉주스’로 상표 등록을 하려고 했으나, ‘따봉’은 상품의 성질을 직접적으로 표시하는 단어라고 하여 상표 등록이 거절되었다고 하고요. 이렇게 시중에 ‘따봉’이란 말이 유행할 때에 저도 한 때 ‘따봉판사’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따봉판사’로 불렸다면, 뭔가 제가 재판을 잘 했거나 인기가 있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말씀드리지요. 제가 부산지방법원에서 민사단독판사를 할 때입니다. 새로 민사단독재판장을 맡으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주취감경 얘기하다보니 꼭 감경해주어야겠는데 술도 먹일 수 없어서 곤혹스러웠던 사건이 생각납니다. 제가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할 때인데, 강도상해죄로 1심에서 징역 3년6월을 선고받고 올라온 사건입니다. 강도가 상해까지 입혔는데 무슨 봐줄 것이 있느냐고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죄명만 강도상해로 거창하지 실제 사건은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사건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이렇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직장을 잃고 이것저것 다 해보는데 하는 것마다 안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 학비며 병원비며 나가야 할 돈은 많습니다. 그래서 방문판매를 시작합니다. 사건 당일에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방문 판매를 해보나 별 성과가 없습니다. 당장 내일 00원의 돈이 필요한데……. 한숨을 푹푹 쉬며 어느 아파트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준 안주인에게 상품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역시 이번에도 실패입니다. 앞이 캄캄해오는 피고인의 눈에 피해자의 손가방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 피고인은 순간적으로 가방으로 손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를 제지하려는 피해자를 뿌리치다가 피해자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고요. 도둑이 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예전 재판에서 판사들이 많이 한 ‘주취감경’이 생각납니다. ‘주취감경(酒醉減輕)’이란 술에 너무 취하여 심신미약 상태에 이르렀다고 형을 감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은 술 먹고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지만, 제가 형사재판장을 할 당시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술 먹고 발생하는 범죄 가운데 많은 범죄가 폭행입니다. 그런데 당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은 위험한 물건을 이용하여 남을 폭행하는 경우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고(3조 1항), 특히 야간에 이런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3조 2항). 그런데 술집에서 시비가 벌어지면 술병을 들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위험한 물건을 이용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대개의 술집 시비라는 것이 야간에 일어나는 것이니까 5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술집에서 일어난 폭행이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야 할 만큼 죄질이 안 좋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평소 교도소라고는 가 본 적이 없는 소시민이 술집에 갔다가 이런 경우에 휘말리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리고 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제 공민왕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공민왕은 망해가는 고려에 마지막 희망을 던지며 개혁정치를 하였으나,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자 정치에 뜻을 잃고 방탕한 생활에 빠집니다. 심지어는 자제위를 설치하여 미남 청년들과 남색(男色)을 즐기기도 합니다. 《고려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공민왕이 심화병이 나서 홍륜, 한안 등으로 하여금 비를 강제로 능욕하게 했다. 비가 이를 거절하자 임금이 노하여 칼을 뽑아 치려고 하니 비가 겁을 먹고 복종했으며, 그 뒤에도 홍륜 등은 임금의 명령을 핑계 삼아 여러 번 왕래했는데, 비도 그것이 거짓말인 줄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아 드디어 임신했다.” 공민왕은 남색을 즐길 뿐만 아니라 관음증에도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자제위의 홍륜, 한안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인 익비를 간음하게 하고 그걸 보면서 즐겼습니다. 당연히 왕비가 반항을 하니 칼을 뽑아 협박하고요. 으~음~~ 다른 남자가 자기 아내 강간하는 것을 보면서 즐긴다? 제 정신으로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나요? 세상에! 개혁군주가 타락하니 이렇게 변하는군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저는 다른 한편으로 한 때 고려 부흥을 위해 개혁의 팔을 걷어 올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