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 경복궁역 쪽으로 가다 보면 ‘종교교회’라고 있습니다. 종교교회는 캠벨 선교사가 1900년 부활절에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며 시작되었는데, 교인이 늘어나면서 1908년 지금 자리에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역사 오랜 교회지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제 고교, 대학 선배가 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처음 ‘종교교회’라는 이름을 접하였습니다. 처음에 종교교회라고 하니, 당연히 ‘종교(宗敎)’가 먼저 떠올랐겠지요? 그래서 “굳이 교회 이름에 ‘宗敎’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있나?” 하며, 피식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宗敎’교회가 아니라 ‘琮橋’교회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종다리교회’가 될 텐데, 교회 이름에 다리 ‘橋’자가 들어가는 것도 여전히 특이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 여기에 ‘종침교(琮琛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청계천의 상류 부분인 백운동천과 백운동천에 합류하는 사직동천이 여기에 있어서 이를 건너가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던 거지요. 백운동천과 사직동천은 지금은 복개되어, 그곳을 지나다녀도 여기에 시내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교회가 들어설 무렵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해진 오스카 쉰들러(1908~1974)라고 아시지요? 쉰들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유대인 약 1,200명을 자신의 공장 노동자로 빼돌려 자기 재산을 소모해가며 끝까지 지켜낸 독일계 체코인 사업가입니다. 한국에도 그런 의인이 있어 한국판 쉰들러라고 불리지요. 도올의 책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으면서 알게 된 한국의 쉰들러는 바로 6. 25 당시 제주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문형순 경감(1897~1966)입니다. 문 경감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직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입니다. 그는 광복 뒤 경찰에 투신하여 1947년 7월 제주도로 부임합니다. 그다음 해에 4.3 민중항쟁이 발생하였으니, 문 경감은 4.3 민중항쟁을 직접 몸으로 겪으신 분입니다. 1948년 12월 말 무렵에 진압군인 제9연대는 여순진압 작전에 공적을 세운 제2연대와 맞교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9연대는 떠나기 전에 자기들도 제2연대의 여순진압에 필적할만한 공적을 세우기 위해 군인으로서 기본적인 양심도 버립니다. 곧 이들은 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도올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보면 여순 민중항쟁 때 죽은 박찬길 검사 얘기도 나옵니다. 검사가 죽었다고 하니까 반군에 의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경찰에 의해 총살당한 것입니다. ‘으잉? 경찰이 죽였다고? 그럼 빨갱이 검사였겠구먼.’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박 검사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검찰의 위력을 생각하면 검사가 경찰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 않지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여순항쟁 무렵 박 검사는 순천지청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어떤 시대입니까? 없던 빨갱이도 만들어내던 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박 검사는 경찰이 송치해오는 사건 가운데 증거가 부족한 사건은 과감하게 무혐의 처분을 하고, 경미한 사건은 기소유예합니다. 이렇게 박 검사의 무혐의 결정과 기소유예가 늘어가니까 경찰의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찰의 불만에 기름을 붓는 일이 생겼습니다. 박 검사가 어느 경찰관을 기소한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어느 경찰관이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이 경찰관을 보더니만 갑자기 도망가더랍니다. 의심이 든 경찰관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도올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단이 되고, 아직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는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이 소련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3.8선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미국은 일본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별로 생각이 없던 소련을 끌어들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서부전선의 병력을 빼서 동쪽으로 돌릴 만큼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소련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과 대결을 벌이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아마 러일전쟁 때 만만하게 보던 일본에 참패한 쓰라린 기억이 있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일본이 원자탄 한 방으로 비틀거리자, 소련은 미국이 차려준 밥상을 걷어갈까 봐 부랴부랴 만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정세 판단을 잘하여 소련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분단의 비극도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우리의 역사나 문화, 우리민족의 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그러니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약소국의 서러움을 씻어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패전국의 한 영토에 진주한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으면서 철학자인 도올이 어떻게 현대사에도 정통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풀렸습니다. 2004년에 EBS에서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였습니다. 명동을 무대로 활동하던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변영로, 이봉구 등 문인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것이지요. 명동백작은 이봉구의 별명입니다. 명동에 가면 명동예술극장 근처에 ‘은성주점 터’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이들이 드나들던 술집이 있던 곳을 알리는 표석이지요. 이 은성주점은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술집입니다. 명동에 나가실 일 있으면 한 번 이 표석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도올이 이 드라마의 광팬이었던 모양입니다. 도올은 드라마가 종영되는 날 밤 새벽에 흥에 겨워 <명동백작>이라는 시를 하나 씁니다. 오랜만에 보았다 명동의 백작들을 ... 김수영처럼 무엔지도 모르는 말장난이 아닌 물흐르듯 토해내는 피를 잉크 삼아 끄적거리고 싶어졌다 평범을 거부하며 자유를 구가하고 순간의 해탈을 위해 삶의 시각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려야 했던 그 군상들의 군더더기조차 이젠 소중한 생명의 저음 ........ 이 짧은 자유라도 만끽할 수 있다는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도올 김용옥 선생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었습니다. 책 표지의 부제는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입니다. 그렇기에 저도 도올이 보는 4.3과 여순사건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샀습니다. 그런데 역시 도올답게 글이 천방지축으로 튑니다. 너무 아는 것이 많으니까 글이 나아가다가도 곁길로 빠져 한참 설을 풀게 되지요. 도올도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이러한 얘기를 자세히 하고 앉아있을 계제가 아니지만, 한 예를 더 들어보자! 나의 죄업이란 진실로 너무 많이 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알아도 너무 정밀하고 정확하게 안다는 데 있다. 알면 괴롭다. 알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측면이 너무 많이 보이고 또 그것을 종합해보면 우리 상식의 터무니없는 오류에 대해 분노가 치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눈감고 살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것들이다. 세밀하게 안다는 것만으로 세계가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세밀하게 아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이크로와 매크로는 반드시 동시적일 수밖에 없다.” 예! 도올은 알아도 너무 많이 압니다. 그래서 이 책도 400쪽 가까운 분량인데,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남의 요지에는 두 임금이 이웃하여 영면(永眠)하고 있다. 바로 성종(선릉)과 그의 아들 중종(정릉)이다. 워낙 비싼 땅이라 그런지 능역(陵域)을 싹둑싹둑 잘라 최대한도로 개발하느라고, 왕릉 바로 옆까지 길이 나있다. 정릉 옆길은 이면도로라 그나마 차들이 적게 다니는데, 선릉 옆길에는 성종이 누워있건 말건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종은 살아서는 조선의 문물을 완비하였다고 하여 묘호(廟號)도 이룰 ‘성(成)’자를 써서 성종이라 했지만, 죽어서는 영 잠자리가 편안치 않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성종의 시신을 능욕하더니만, 오늘날 후손들은 왕릉에 바짝 붙여 넓은 도로를 내었으니 성종이 무덤 안에서 영원의 잠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종은 그나마 옆에 아내(정현왕후 윤씨)라도 같이 있지만, 중종은 홀로 누워있다. 임금이 영면하는 곳이면 당연히 그 옆에 왕비도 같이 있어야 하거늘, 중종은 왜 홀로 누워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알아보러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종은 원래 고양시 서삼릉 내 둘째부인 장경왕후(희릉) 옆에 같이 묻혔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었으니, 중종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이지요? 코로나바이러스 예방과 치료도 문제지만 이 때문에 초래된 사회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이태원에 나갔는데,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평소 주말이면 아무리 춥더라도 사람으로 붐비던 이태원 거리인데, 이렇게 거리가 설렁한 것은 처음 봅니다. 저녁을 먹고 가끔 들르던 맥주집에 들어갔는데, 한참 동안 손님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업원들이 우리가 주문한 것 가져다주고는 자기들끼리 카운터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더군요. 자기들도 평소 같으면 바빠야 할 시간에 자기들끼리 노닥거리고 있으니, 노닥거리면서도 어색했을 것입니다. 이 집에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도 처음 봅니다. 아마 평소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나오던 명동도 틀림없이 썰렁할 것 같습니다. 이거~ 빨리 진정이 되어야지 이러다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많이 끼칠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그런데 여러 나라가 중국 우한으로 전세기를 파견하여 자국민들을 데려오는 등 온 세계가 이 때문에 떠들썩하지만, 사실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중국에 304명뿐입니다. 아! 참! 필리핀에서 오늘 한 명 사망자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초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의 연인이었다는 것만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있지 않습니까? 서양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먼저 인쇄되었다고 우리가 자랑하는 불교서적 말입니다. 이 《직지심체요절》을 콜랭이 프랑스로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서양놈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갔구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콜랭이 골동품상에게 값을 치루고 산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온 콜랭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되는대로 우리의 책과 미술품 등을 사들였다는군요. 콜랭이 그렇게 수집한 책 중에 이런 귀한 책이 있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이 책을 산 콜랭이나 이를 판 상인이나 그저 고서(古書)로만 생각하고 사고판 것이지, 이 책이 그렇게 귀한 책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국인입니다. 이 책을 프랑스로 가져간 콜랭은 1911년 이 책을 고서 경매장에 내놓아, 이를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샀습니다. 그리고 앙리는 죽을 때 이 책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뒤 19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신경숙 작가의 소설 <리진>에는 홍종우(1850~1913)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홍종우는 한국인 첫 프랑스 유학생입니다. 마침 리진이 파리에 머무는 시기와 홍종우의 파리 유학 기간(1890~1893)이 겹치기에 작가는 또한 리진과 홍종우를 연결합니다. 둘은 프랑스의 유일한 조선인 남녀이었으므로 실제로도 파리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역사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홍종우는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아사히 신문사 촉탁 식자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은 뒤, 프랑스 유학길에 오릅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고 프랑스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 것이지요. 왕권 절대주의 애국자 홍종우는 파리에서도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며 다녔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서양옷을 입고 다니던 리진보다는 홍종우가 더 파리 시민들의 눈에 잘 띄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홍종우가 리진에게 이성적인 눈길을 주자, 리진이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리진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홍종우는 계속 상소를 올려 콜랭이 리진을 데리고 갈 수 없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