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춥고 눈도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은 ‘대한’이었는데, 예전에는 소한 대한 추위가 별로 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는 센 정도가 아니라 매섭고 그것이 설 연휴로 이어졌다. 모처럼 겨울 같은 겨울에 새해를 맞은 셈이다. 그렇게 추운 어느 날 서울 시내에 일이 있어서 나가 보니 다들 움츠리고 길을 걷는데, 헐벗은 가로수들 기둥들에서 무슨 알록달록한 색깔이 보인다. "어 이거 뭐지? "하고 가까이 가 보니 나무들이 털실로 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 눈높이 정도니까 목도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조끼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허리나 어깨 정도의 높이에 꽃이 수 놓인 뜨개질 천들이 나무 기둥을 잘 감싸주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볼 때는 기계로 뜬 것이겠거니 했는데 가까이 가서 만져보니 진짜 손으로 뜬 털실이다. 그리고 그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작품마다 아주 아름답다. 은은한 초록 바탕에 매화꽃이 활짝 핀 것도 있고 노란 해바라기꽃 같은 것도 있다.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진한 색조의 대비가 우울한 겨울의 거리에서 밝은색의 향연으로 눈을 확 끌어당긴다. 이 회색의 음산한 도시 겨울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있으면 설이구나. 어릴 때 설을 마냥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다들 먹는 것이 부실할 때여서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이 되면 큰 집이건 외갓집이건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는 곧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어 그날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런 달콤한 기억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 듣는 것이었다. 특히 설에는 대부분 날씨가 추우니 미리 초저녁에 군불을 때어 뜨끈뜨끈해진 안방 아랫목에 넓은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발을 집어넣어 무릎을 맞대고는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대충 간식도 먹고 나면 우리는 할머니 팔을 붙잡고 흔들며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곶감을 좋아하던 호랑이, 달순이 별순이 이야기 등 몇 번씩이나 들어서 줄거리를 다 알지만 들을 때마다 재미있었다. 친구들 만나보면 이야기 솜씨가 좋은 할머니들은 별별 이야기를 다 해주신다고 한다. 요즘 우리 손자 손녀가 딱 그때 내가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이여서 손주들이 명절에 집에 오면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할아버지인 나는 말솜씨가 없어 할머니한테 미루면 집사람은 어떻게든 애들을 무릎 앞에 앉히고 이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인 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은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평양으로 급파한다. 거기에는 7년동안 평안감사를 하고 있는 박엽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왕명을 받은 선전관 일행은 군사를 동원해 평안감영에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사정도 모르는 박엽을 불러내어 목을 벤다. 그 이후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을 보면 박엽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방자해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 익랑(翼廊, 날개처럼 펼쳐진 회랑)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長房)을 만들고, 도내의 명창 백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밤낮으로 오락을 일삼았다. 늘상 음탕한 짓을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매를 때리고, 결미(結米, 조선 때 논밭의 결(結)에 따라 조세로 바치던 쌀)를 받아들이되 수를 배로 해서 독촉하여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늦추는 일이 있으면 참혹한 형벌을 써서 죽이곤 했다. 도내의 이름난 기생을 모아서 날마다 한 곳에서 밤낮 즐기며 풍마(風馬) 놀음을 하니, 하루에 소용되는 곡식이 6, 70섬이었으며, 참혹하게 형을 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시작은 흰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리 그림이 얼마라도 그려져 있으면 원하는 새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해마다 맞이하는 것이지만 새해를 맞을 때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 새해 아침에 첫눈이 오면 다들 좋아하는 것이겠지. 올해 토끼띠의 해가 밝았다. 지난해 말 칠순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올해부터는 세는 나이가 아니라 산수로 정확히 떨어지는 나이로 칠십이다. 물론 가을에 생일이 와야 만 70이니 그때까지는 아직 칠순이지만 칠순이건 만 칠십이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래도 그런 개념상의 나이 헤아리기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니 그렇게 따지고 사는 것이지. 아무튼 올해 나도 진정으로 칠짜 항렬로 올라간다. 진행형 '올라간다'가 아니라 사실상 현재완료형의 '올라갔다'라고 함이 맞겠다. 후배들을 만나 내가 이제 칠짜 세대로 들어갔다고 하니 놀라긴 하던데 막상 선배들은 나이 드시는 것이 습관화되어있어 그런지 내가 칠짜를 거론하면 "그래. 아직도 한창이네"라고 말해주니 그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인생에 있어서 칠십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에게 있어서의 올해 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얼마 전에 가족여행으로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저녁 식사를 하는 옆자리에 박세리 선수 일행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방송국의 기자였지만 대한민국의 골프사를 바꾼 세계적인 영웅인 박세리 선수를 가깝게 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굳이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고, 이에 박세리 선수는 감사하게도 (죄송, 약간 취기가 오른) 필자는 물론 필자의 손주들과 기념사진도 찍어주는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세리 선수와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30여 년의 기자생활 중에 유일하게 골프 취재, 그것도 박세리 선수가 우승한 대회를 취재하였으니 바로 2001년 8월 초 런던에서 열린 브리티시 오픈이었고 그 때 필자는 런던특파원으로 있었다. 당시 특파원은 골프 등 스포츠는 보통 취재대상이 아니어서 그 주에 나는 여름휴가를 간다고 일요일에 출발하는 동유럽 여행팀에 돈도 다 낸 상태였다. 그런데 막판에, 그것도 토요일에야 취재지시가 내려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대회 3일째에 박세리 김미현 두 한국 선수가 1, 2위를 다투고 있어 취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휴가여행 일정은 아침 일찍 폴란드로 출발하는 것이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번 주말이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우리말로는 성탄절이라고 하는데 웬일인지 성탄절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엄숙한 것 같아 신세대들은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성탄절 즈음해서 많이 듣는 말이 '할렐루야'일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그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난 날이니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가? 그야말로 구세주이신 신의 영광을 찬양해서 마땅한 날이기에, 할렐루야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기도하면서도, 또는 심지어는 거리에서 전도를 강요하는 분들에게서도 이 말은 자주 듣는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찬양하다’를 뜻하는 ‘hallel’과 유태교의 신 ‘Yahweh’의 준말인 ‘yah’가 합쳐진 말이라고 하니 글자 그대로 신을 '찬양하다', '찬양하라'의 뜻이 된다. 필자는 기독계인 대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한 해에 한 번씩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하며 그때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 합창곡을 꼭 불렀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 2년여 동안 집 뒤편 둘레길을 돌면서 하루하루 신경을 쓴 것이 있다. 바로 둘레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작은 돌탑의 존재였다. 굵은 돌 10여 개 남짓을 위로 쌓아 올린 돌탑이 하나가 서 있다가 어느 날 보면 누군가가 무너뜨려 놓았다. 돌탑은 두 개일 때도 있었지만 역시 세워지면 곧 무너졌다. 그렇게 세우고 무너트리는. 말하자면 돌탑 전쟁이 일 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대 계곡은 큰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토사가 휩쓸려가 이에 대해 계곡의 바닥을 파고 굵은 돌로 물길을 새로 만드는 사방작업이 2년 전 봄 여름에 있었는데 그 공사가 끝난 뒤 가을 계곡 옆 언덕배기에 누군가가 작은 돌탑을 처음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며칠 뒤에는 그게 무너져 있었고 이에 다시 세워졌다가 며칠 뒤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해가 바뀌면 무너뜨리는 분이 참고 넘어가 줄까 했지만, 여전히 세우고 부수고 하는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돌탑을 쌓는 분은 남이 일껏 힘들게 만들어놓은 돌탑을 왜 그렇게 부수려 하느냐고 경고성 글을 쓴 종이를 달았는데 부수는 분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수는 바람에 종이도 땅에 떨어졌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2월이 되니 일 년이란 시간이 거의 다 가는구나. 열두 달을 거의 다 보내고 이제 한 달도 안 남았구나. 어영부영 일 년을 다시 마감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올해 무엇을 했지?" 뭐 특별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무슨 기억 나는 일이 있으리오. 올 한 해 즐거웠던가? 지루했던가? 힘들었던가? 재미있었던가? 그런데 이런 질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질문이다. 그때 옛날에 본 어느 말이 생각난다. "세상은 증오로 살기엔 기나긴 권태요, 사랑으로 살기엔 짧은 환희다" 이 말은 2003년 10월 19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복식을 통해 성자 다음의 품계인 ‘복자’가 된 마더 테레사, 곧 테레사 수녀의 언행과 어록을 기록한 책을 소개하면서 출판담당기자가 머리말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말일 것이다. 올 한해가 지루했으면 그것은 증오로 살았다는 말일 것이요, 짧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사랑으로 살았다는 뜻일 거다. 우리는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오로지 내가 편했는지, 즐거웠는지, 재미있었는지, 자기 한 몸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이 한 해를 살아온 것이 아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70년대 후반에 직장을 시작해 퇴직하기까지 30여 년을 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였던 필자는 일반적인 기자들보다는 대형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하는 행운을 누렸다. 기자라고 하면 사건이 일어나거나 세상이 변하는 현상 등을 취재해서 짧은 뉴스 속에 담아내는 일이 주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그 뉴스라는 것이 보통 1분 30초를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런 매일의 뉴스와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회사 밖으로 나가서 취재해서 50분 단위로 만들어내는 큰 프로그램을 필자가 다른 기자들보다도 더 많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취재는 국내는 물론 멀리 나라 밖에도 가게 되고, 그것도 남들이 가지 못하던 곳을 처음 간 경우도 많았다. 주요한 것으로는 1987년에 우리나라 국산자동차 3대를 직접 북미대륙으로 가져가서 그 차를 몰고 넉 달 동안 2만 킬로미터를 달리면서 그 나라의 자연과 역사, 사람과 문명의 문제를 조명한 '세계를 달린다'란 프로그램의 북미편이 있었고,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중국의 실크로드를 한국인 처음으로 1989년 5월 한 달 동안 수도인 베이징에서 우르무치까지 5천 킬로미터를 취재한 '서역기행 대륙회당 5천킬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늦가을 인사동 거리, 못생긴 얼굴 같은 글씨로 서예전을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얼 이종선이란 분의 서예전인 모양인데, '七十而已'(칠십이이)라는 전시회 이름이 특이합니다. 개막식장에서 전시회의 주인공은 '칠십이이'라는 말은 "제 나이 칠십입니다" 혹은 "칠십이 되었군요"라는 뜻이랍니다. 고희를 맞아 그동안 작품활동 한 것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지나간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는 겁니다. 전시장 안의 글씨들은, 한자 한문도 있고요, 한글 서예작품이 많은데, 뭐 글씨가 삐뚤삐뚤, 들락날락, 흐느적 흐느적... 보통의 서예글씨가 아니라 마치 글자들이 춤을 추는 그런 작품이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말 메멘토 모리, "언젠가는 우리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무시무시한 말이 뭉툭 뭉툭한 채로 눈에 들어옵니다. 흔히 세로로 쓰는 작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읽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왼쪽에서부터 읽도록 했고, 작은 글씨도 우리가 언젠가는 인생이란 역에서 내려야 한다는 내용을 깔고 있는, 제법 의미가 있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글귀를 마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