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제산 기자] 봉황대 _화산(華山) 정상수(鄭相秀)_ 鳳凰一去復來亭 (봉황일거부래정) ᄀᄋᄀᄀᄀᄋ⊚ 竹谷溪山倍有靈(죽곡계산배유령) ᄀᄀᄋᄋᄀᄀ⊚ 掃石當時隨筆古(소석당시수필고) ᄀᄀᄋᄋᄋᄀᄀ 披雲今日見天靑(피운금일견천청) ᄋᄋᄋᄀᄀᄋᄋ 詩情謾發狂忘老(시정만발광망로) ᄋᄋᄀᄀᄋᄋᄀ 花事頻仍醉不醒(화사빈잉취불성) ᄋᄀᄋᄋᄀᄀ⊚ 第待斜陽芳草路(제대사양방초로) ᄀᄀᄋᄋᄋᄀᄀ 許多歸意暫車停(허다귀의잠거정) ᄀᄋᄋᄀᄀᄋ⊚ ▲
[그린경제/얼레빗 = 제산기자] 봉황정 -덕헌 이삼기- 鳳凰臺上鳳凰亭 (봉황대상봉황정)ᄀᄋᄋᄀᄀᄋ⊚ 聞道鳴岩千古靈 (문도명암천고령)ᄀᄀᄋᄋᄋᄀ⊚ 捿鶴啼猿惟日樂 (서학제원유일락)ᄋᄀᄋᄋᄋᄀᄀ 孤松脩竹四時靑 (고송수죽사시청)ᄋᄋᄋᄀᄀᄋ⊚ 半宵淸趣月光好 (반소청취월광호)ᄀᄋᄋᄀᄀᄋᄀ 白首閑情塵夢醒 (백수한정진몽성)ᄀᄀᄋᄋᄋᄀ⊚ 活畫江山皆悅眼 (활화강산개열안)ᄀᄀᄋᄋᄋᄀᄀ 如雲賀客去還停 (여운하객거환정)ᄋᄋᄀᄀᄀᄋ⊚ ▲ 봄의 기쁜 눈 (운곡 강장원) 한글
[그린경제/얼레빗 = 제산 기자] 봉황정 예찬시 13 조정희 鳳凰臺建鳳凰亭(봉황대건봉황정) ᄀᄋᄋᄀᄀᄋ⊚ 天闢鳴岩地秘靈(천벽명암지비령) ᄋᄀᄋᄋᄀᄀ⊚ 一帶柳川流水活(일대유천유수활) ᄀᄀᄀᄋᄋᄀᄀ 千重楓岳捲雲靑(천중풍악권운청) ᄋᄋᄋᄀᄀᄋ⊚ 聊將詩賦爭相賀(요장시부쟁상하) ᄋᄋᄋᄀᄋᄋᄀ 更擧壺樽醉未醒(갱거호준취미성) ᄀᄀᄋᄋᄀᄀ⊚ 慶祝美哉輪奐頌(경축미재윤환송) ᄀᄀᄀᄋᄋᄀᄀ 入聞客子返車停(입문객자반거정) ᄀᄋᄀᄀᄀᄋ⊚ ▲ 선비들은 시문을 서로 겨룬다
[그린경제/얼레빗=제산 기자] 봉황정 예찬시 (9) 동강(東江) 안승학(安承學) 江山淑氣聚斯亭(강산숙기취사정) ᄋᄋᄀᄀᄀᄋ⊚ 絶壁層岩鬼巧靈(절벽층암귀교령) ᄀᄀᄋᄋᄀᄀ⊚ 一朶梅化看益艶(일타매화간익염) ᄀᄀᄋᄋᄋᄀᄀ 雙峰楓岳坐來靑(쌍봉풍악좌래청) ᄋᄋᄋᄀᄀᄋ⊚ 酒樽如海人皆醉(주준여해인개취) ᄀᄋᄋᄀᄋᄋᄀ 魚膾登盤眼忽醒(어회등반안홀성) ᄋᄀᄋᄋᄀᄀ⊚ 功告樂成無限景(공고낙성무한경) ᄋᄀᄀᄋᄋᄀᄀ 更將風月忘歸停(갱장풍월망귀정) ᄋᄋᄋᄀᄀᄋ⊚ ▲ 운곡 강장
[그린경제 = 제산 기자]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大山面) 대곡(大谷)마을에는 커다란 바위산이 있는데 이를 봉황대라 부른다. 하서 김인후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 중국인이 썼다는 봉황대(鳳凰臺)라는 세 글자와 함께 선사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岩刻畵)가 각인되어 있다. 암각화는 1991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 되어있다. 오늘 날 봉황대가 남원의 명소가 된 것은 속칭 울바위[鳴岩]로 알려진 탕건(宕巾)바위의 영험(靈驗) 때문이라고 본다. 울바위가 언제부터 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에 바위가 처음으로 울어 이 마을의 이동미공이 문과에 급제할 것을 예고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바위가 울었고 그 때 마다 마을은 급제자가 나오는 경사를 맞곤 했으며 1945년 봄에도 크게 울어 8.15광복을 정확하게 예고한 바 있다. 광복 후 이 마을에서는 서울대 법대생이 4명이나 배출 되었으며 장관, 차관, 판사, 변호사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잇따라 나왔다. 자고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거니와 이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더욱 신비감을 더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대산면 대곡리 봉황정과봉황
[그린경제=가람 기자] 수임졍, 승월대,승월교 , 청허부... 지난 내용은 송강선생이 광한루원을 조성시의 광한루원만을 소개하였다. 해서 이번호에는 광한루원 앞 요천수와 관련한 선조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소개해 본다. 광한루 앞 요천 건너편 바위의 아랫 부위엔 “승월대(昇月臺)”란 표기가 있다. 승월대란 말을 풀이하면 달에 오르는 누대라는 뜻이다. 그 전설의 내용은 팔월 한가위 둥근달이 떠오르면 하늘의 선녀들이 광한루원앞 요천변에 내려와 비파를 타며 춤과 노래로 밤새 노니다가. 새벽닭이 울 때 이곳 승월대에서 금빛 달기둥을 타고 달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승월대 위에자리했다는 기록을 통해 지난해조성한수임정(水臨亭) 승월대는 요천을 사이에 두고 광한루와 마주하고 있는데 그 위에 수임정(水臨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근래 수임정을 복원하였다. 물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수임정과 광한루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재현코자 건립한 다리가 승월교 이다. ↑승월교(昇月橋) 승월교는 승월대와 천상의 월궁인 청허부를 이어주던 전설의 금빛 달기둥을 상징한다. 선녀들과 요천에서 노니다가 승월대위에서 달기둥을 타고 월궁에 오르듯이 사람들이 승월교를 건너 지상의 월궁
안처순과 조광조와의 해후(邂逅) 사제당(思齊堂)과 영사정(永思亭) [그린경제=제산 기자] 남원의 서남쪽에 위치한 금지면(金池面) 내기(內基) 마을에 사제당과 영사정이라는 고옥(古屋)이 있는데 관광가이드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특히 2000. 9. 2에 설립된 사제당 기념관에는 1994년 각각 보물 제 1197호와 제 1198호로 지정된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과 기묘제현수첩(手帖)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보물은 한국학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황폐를 겪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기묘제현수필은 사제당(思齊堂) 안처순(安處順)선생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동료와 붕우(朋友)들이 송별의 정표로 써준 서(序)와 시(詩)들을 모아 하나의 첩(帖)으로 장정(裝幀)한 것으로 이 속에는 조광조김정김구기준 등의 글이 들어 있다. ▲ 영사정(永思亭) 2代에 걸친 효도 지금으로부터 사백여년 전에 사제당을 처음 지은 안처순 선생의 약력을 먼저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1492(성종23)~1534(중종29).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당 또는 기재(幾齋).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문성公 안향(安珦)의 9대손. 기(璣)는 성균관
화산옹(華山翁) 바위의 전설 [그린경제=제산 기자] 남원에서 서쪽으로 50여리 떨어진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 책여산(冊如山)이라는 명산이 있다. 산 중턱에 화산옹이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옆에서 보면 흡사 가을 메뚜기가 벼 이삭에 앉아 입질하는 것 같고 뒤에서 보면 몸집이 우람한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다. 앞모습은 도포 입은 백발노인옹이요. 머리는 영락없이 미륵불이다. 그래 그런지 별명도 가지가지다. 메뚜기바위. 장군바위. 미륵불. 화산옹. 아마도 이렇게 많은 별명을 여러 개 가진 명물도 없을 것이다. 아득한 옛 날부터 화산옹은 신기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풍년이 들려면 아름다운 백색을 띄웠고 흉년이 들려면 흑색을, 큰 불이 나거나 돌림병이 퍼질 때에는 청색을 띄었다. 그리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에는 적색으로 변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행인이 채계산(책여산)을 지나갈 때, 화산옹에게 경의를 표하고 가면 무사하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삐거나 하는 사고를 당하기 일 수였다. 말이나 수례 탄 이도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화산옹은 외경과 민간신앙의 기복 대상이 되었으니, 흉년이 들
영광에 부활한 유자광 고향에서 배척받는 무령군 유자광 [그린경제=제산 기자] 전장(前章)에서 무령군(武靈君)은 희대의 영걸이라고 언급되었거니와 이는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그를 미화하거나 우상화하기 위한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검증된 객관적인 사료(史料)를 토대로 하여 제 3자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내린 평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군은 탯자리인 남원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해 왔다. 지금도 유자광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보다는 가로 젓는 사람이 더 많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인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령군의 묘소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최근에 이백면 영광 유씨 선산에서 훼손된 망주석(望柱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지점이 무령군의 묘역(墓域)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할 뿐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부근에서 오래된 거구(巨軀)의 유해가 한 구 나와 유씨 문중에서 이를 무령군의 유해가 분명하다고 믿고 행정당국에 그 유전자를 검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관계자로부터 역적의 유전자 검사에 쓸 예산이 어디 있느냐?라는 투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일도 있다고 들었다.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