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 부활한 유자광 고향에서 배척받는 무령군 유자광 [그린경제=제산 기자] 전장(前章)에서 무령군(武靈君)은 희대의 영걸이라고 언급되었거니와 이는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그를 미화하거나 우상화하기 위한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검증된 객관적인 사료(史料)를 토대로 하여 제 3자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내린 평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군은 탯자리인 남원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해 왔다. 지금도 “유자광”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보다는 가로 젓는 사람이 더 많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인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령군의 묘소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최근에 이백면 영광 유씨 선산에서 훼손된 망주석(望柱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지점이 무령군의 묘역(墓域)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할 뿐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부근에서 오래된 거구(巨軀)의 유해가 한 구 나와 유씨 문중에서 이를 무령군의 유해가 분명하다고 믿고 행정당국에 그 유전자를 검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관계자로부터 ‘역적의 유전자 검사에 쓸 예산이 어디 있느냐?’라는 투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일도 있다고 들었다. 역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러한 발굴 물은 귀중한 학술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거늘 협조는 못할망정 남의 조상을 모독하는 망언까지 서슴치 않다니 공직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이를 단순히 무지(無知)의 소치로만 돌릴 것인가? 전주 이씨(李氏)가 무령군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무령군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것도 고향이 아닌 이백 여리나 떨어진 타지에서? 그리고 그것도 영광 유씨와는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전주 이씨 문중에서?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하고도 남을 이 소문. 혹시 유언비어가 아닐까?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무령군 유자광의 추모비를 세운다는 것은 고향인 남원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영광유씨 문중에서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타지에서 그것도 타성의 문중에서 이 일을 해냈다고 하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고전문화 연구회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행동철학(?)에 따라 두 번의 현지답사 끝에 그것이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남창리 663번지의 주인 영광읍을 벗어나 남쪽으로 이십 여리를 가면 천안 삼거리를 연상케 하는 삼거리에 군남면 남창리가 나온다. 마을을 관통하는, 육창2로라는 큰 길 옆으로 낮은 산을 등진 삼천평 규모의 넓은 대지에 여러 채의 한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가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남창리 663번지로 지금의 주인은 동호(東湖) 이중신(李重信)선생이다. 무령군의 기념비는 663번지의 집 앞 큰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각각 무령군의 행적과 유색(有色) 초상화를 새긴 두 개의 육중한 돌이 행인의 눈길을 끌면서 무령군의 부활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비석을 세운 이는 다름 아닌 바로 동호 이중신 선생이다. 동호선생은 팔십 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이 못 지 않는 열정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동호 선생의 말에 따르면 남창리 663번지의 지세와 내력은 다음과 같다. 남창리는 군유산(群遊山) 줄기의 매봉산과 불무산(佛舞山)이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루며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다. 분지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백여 두락의 논이 농사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호선생의 소유라고 했다. 주산(主山)은 오공성국(蜈蚣成局), 즉 지네 형국이고 그 오공성국의 머리 부분이 663번지란다. 동호의 15대조인 이세형(李世亨)이 오공성국터에 이사하여 5칸의 고옥을 짓고 살면서부터 전주 이씨의 세거지지(世居之地)가 되었다. 그런데 663번지는 원래 영광 유씨의 세거지지였었다. 영광 유씨는 이 터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고 살았다. 마지막으로 이 터를 누린 사람은 무령군의 아버지 유규(柳規)였다. 영광군지(誌)에 따르면 유규는 이 집에서 적자 자환(전라감사)과 서자 자광(子光) 형제를 잉태시켰는데 특히 자광은 용꿈을 꾸고 침모와 관계하여 잉태한 아이었다. 유규는 그 후 남원으로 이사를 가서 두 아들을 보았다. 이것이 영광사람들의 무령군 출생 씨나리오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령군의 남원 잉태설화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밴 두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이백 여리나 떨어진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는 어렵다. 침모와의 불미스런 관계를 숨기기 위해 멀리 이사를 갔다는 설이 있으나 석연치가 않다. 어쨌거나 두 설화 중 하나는 분명 틀린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동호선생의 투철한 역사관 그러면 동호선생은 무엇 때문에 전주 이씨의 후손으로서 자기와는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타 씨족의 열조(烈祖)를 위하여 사재(私財)를 들여서까지 기념비를 건립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핵심적인 이 질문에 그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무령군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인물입니다. 무령군이 아니었으면 조선왕조는 기반이 약해서 오래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무령군이 처음 세운 공으로 이시애 난의 평정을 들었다. 역사는 구성군 이준이 이시애 난을 평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막후에서 계략을 짜낸 사람은 무령군이었다. 무령군 이야말로 평난의 수훈자다. 그리고 무령군의 두 번째의 큰 공은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반정군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박원종이었지만 그 때에도 결정적인 계략을 짜 준 사람은 바로 무령군이었다. 무령군이 아니었으면 반정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것이 동호선생의 지론이었다. “무령군은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입니다.” “내가 무령군의 기념비를 세운다고 할 때 주위에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내가 옳다는 일을 남이 비웃는다고 왜 못합니까?” 우리는 동호선생의 뚜렷한 역사관과 확고한 신념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유자광은 간신이다.” 라는 말에 부화뇌동하여 맞장구를 치는 일은 없었던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영광에 정착한 유래 전주 李씨는 모두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의 후예로 이태조의 직계인 왕손(王孫)과 방계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2백 4십만명(1985기준)의 씨족들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고 그 분파만도 일백개가 넘는 대 성바지로 정승 22명, 대제학 7명, 문과급제 865명, 공신 65명, 청백리8명을 배출했다. 그러니만큼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영광에 거주하는 전주 이씨에 한정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전주 이씨의 영광 입향조(入鄕祖)는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1353~1417)의 증손 효상(孝常)이다. 양도공의 장남 여양군이 요절하자 그의 미망인은 정종의 妃 정안(定安)왕후의 여동생으로 네 아들(월성군 명인, 월평군 종인, 월산군 경인, 월풍군 수인)과 함께 한양에서 외가인 담양군 백동으로 이주했다. 그 뒤 월성군 명인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사매공 효상이 공조정랑을 지낸, 장성부자 장인의 후원으로 처가 동네인 묘량면 영양리 당산 마을(현재 이규헌 家)로 이주했다. 효상의 차남 세형(世亨)이 육창리(현 남창리 663)로 처음 들어와 정착한 이래 그 후손이 15대를 내리 살아 20여세대에 달하고 있는데 동호는 세형의 15대손이다. 한편 효상의 4세손인 응종·황종·홍종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경명·곽재우 등과 힘을 합해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응종公은 영광군수가 부친상으로 자리를 비우자 도별장으로 추대되어 50여인의 삽혈(歃血) 동지를 규합하여 성을 지켜냈고, 그 당시의 삽혈동지들은 지방문화재 201호 지정된 수성사에 봉안되어 매년 제향을 받고 있다. 당산리에는 입향조 李孝常을 모신 봉귀재(鳳歸齋)가 있고 그 밖에도 조상의 덕을 기리는 육왕사(六旺祠)와 고산재(羔山齋) 등이 있다. 현재 영광군에는 1780여 가구에 약 4,800명(2000년 현재) 전주 이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성씨 순위는 군내에서 3위를 차지한다. 전대 미문의 기념비적인 기념비 돌이켜 보면 전주 李씨와 영광 柳씨는 기묘한 인연을 맺아왔다. 우선 세조와 무령군의 만남부터가 그렇다. 무령군은 그 별난 자기소개서를 통해(전장 참조) 세조에게 발탁되어 파격적으로 승진한 이후 내리 5조(朝)를 섬기면서 승승장구하여 그 벼슬이 인신(人臣)을 극하였으니, 영의정과 맞먹는 부원군(府院君)에 까지 올랐다. 무령군과 전주 이씨와의 인연은 이렇게도 극적이고 끈질긴 것이었다. 그리고 남창리 663번지의 주인은 원래 영광 유씨였다. 그런데 유씨가 떠난 후 공교롭게도 전주 李씨가 그 뒤를 이었다. 이를 우연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다가 옛날의 영광 유씨 집터에서 15대를 살아오던 전주 이씨의 후손은 아예 유씨의 조상을 기리는 비석까지 깎아 세움으로써 두 씨족간의 유대를 더욱 돈독하게 함은 물론 무령군에 대한 인식을 바꿀 단초를 열어 놓았다. 전대 미문의 이 기념비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념비적인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오백년동안 역사의 그늘에 잠들어 있던 무령군이 기념비적인 기념비 속에서 이제 마악 기지개를 켜고 부활하고 있다. 부활한 무령군이 그 조상이 남원에 왔던 것처럼 다시 생전의 남원을 향해 뚜벅뚜벅 거보를 내디딜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출전 : 현지답사, 영광군지, 전주 이씨 양도공파 내력, 임진수성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