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광복 71돌이 되었다. 근세 개화기에 정신차리지 못하고 지도자들이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들의 사리 사욕에 혈안이 되어 결국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후 35년을 살아오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올해로 그 71년째에 이른다. 그런데, 한민족의 나라가 없어질 뻔한 것은 최근세 100년 뿐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424년 전 일본은 일본 열도 내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수백년 내전상태를 정리한 후,통일에 앞장섰던 장군들에 대한 보상으로 주기 위한 각종 잇권의 대상으로 조선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늘 글과 말로 싸우면서 논쟁만을 일삼는 조선 정부야 말로 너무 쉬운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일으킨 임진왜란은 이곳 부산 동래에서 처음 교전이 이루어 졌다.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정발장군은 훈련도 되지 못한 관군들과 동래 주민들을 모아 이곳 동래성에서 싸우다 무참히 전사하였다. 그 때 왜장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키라고 말하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답하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너진 동래성은 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산 기장군 바닷가에 있는 해광사는 동쪽으로 바다와 맞닿고 있다. 해광사 대웅전은 동향으로 앉아있고, 그 방향으로 100m만 나가보면 1년 내내 아침에 뜨는 해를 맞이할 수가 있는 바다가 있다. 검은 바위들로 둘러싸인 곳에는 작은 포구가 있고 하루 종일 어선들이 드나들며 생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검은 화산암으로 둘러싸인 오랑대 앞에는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도록 작은 용왕각이 세워졌고, 그 안에는 기장 앞바다를 지키는 용왕과 남녀 동자가 협시하는 모습의 용왕단이 있다. 새벽 동해 일출을 맞이하여 용왕단이 모셔진 오랑대에는 매일 용왕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험한 바다를 삶의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삶을 유지케 하는 동반자와 경외의 대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벽 해가 솟아오르자 잠에서 깨어난 갈매기와 오랑대 주변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들도 군무를 하는 모습이 무더운 삼복중에도 삶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아파트가 주거문화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이 때 수 천년 동안 이어 오던 한민족의 주거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가장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서울의 북촌마을과 경복궁의 서쪽인 서촌마을 도심지역 오래된 한옥마을 되살리기에 큰 힘이 되었고, 서울 도심의 허름하던 옛 한옥들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주변 한옥들의 값이크게 올랐다. 그런 바람으로 오래된 한옥을 고쳐사는 대신새로운 한옥을 단지로 만들어 보자는 여망에서울의 외곽지역 새로운 주거단지를 한옥만으로 지을 수 있도록 계획한 은평한옥마을이 계획되었고, 지금 현대한옥으로 다양한 신한옥이 시도되고있다. 지방으로는 전주의 옛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전주시내 한옥마을이 성공한 도심지 한옥마을 들이다. 이 외에 도시 근교에 넓은 땅에 전통한옥기와집을 이은 한옥마을 들이 여러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바야흐로 한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요즈음 신한옥은 생활 양식의 변화에 따라 한옥의 건물 규모는 커지고 방의 크기도 커졌으며 방의 배치에 있어서도 옛날 한옥과는 차이가 많이 생겼다. 전체 집의모양은 기와를 이은 한옥이자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베그람지역에서 출도된 유물들이다. 베그람은 쿠샨왕조(기원전 1세기~ 기원후 3세기) 여름수도로 번성했던 도시인데, 베그람에 '카피시국'의 도읍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도시의 중심에 있었던궁궐터를 발굴하여 나온 다채로운 청동기, 유리, 석고, 상아장식 들이다. 각각의 유물들은 동서 제국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당시 국제교역도시로 번성했던 베그람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불교의 전달 통로이기도 하였다. 기원 후 67년 경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중국으로 들어와 처음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들은 바로 인도의 서북부를 돌아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지나서 중국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에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이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번성했다고 하며 대승불교가 꽃피웠고, 인도의 경전을중국의한문으로 번역을 주도 했던 스님들 또한 이 지역에서 왔던 스님들이었다. 수많은 경전번역승 중에 기원후 300년 경에 들어온 금강경의 역경승인 구라라집 또한 이곳 왕실 공주의 아들이었으며, 한국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해주었다는 마라난타 또한 이곳의 스님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아직도 내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를 전전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황금유물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황금유물들은 유럽, 북미, 호주, 그리고 아시아등 4대륙 11개국을 돌아 한국에는 12번째로 전시하게 된 귀한 유물들이다. 박물관의 순번으로 치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19번째 기관이 된다. 찬란한 황금유물들의 제작된 연대로도 기원 전후이며, 그 섬세한 기법 또한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최우성 기자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전시중인 '아프가니스탄 황금문화' 에 다녀왔다. 전 전시품을 사진에 담았는데 이를 세편으로 나누어 실을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린다.(편집자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전시중인 '아프가니스탄 황금문화' 전시회에 나온 고대 아프가니스탄의 유물들을 관람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히말라랴 북서쪽에 위치한 땅으로 건조한 사막지방이 많은 땅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있어서는 결코 건너뛸 수가 없는 곳이니 문화의 교차로 이기도 하다.기원 전3세게에는 그리이스 알렉산더대왕이 점령하여 그리이스 양식의 건축물도 들어섰고, 그리이스의 조각기법도 전수하였다. 불교조각의 초기 작품들이 그리이스의 조각기법을 전수할 수 있었던 원인 또한 알랙선더대왕의 동방원정의 덕을 보기도 하였다. 또 불교의 동양으로 전파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거칠 수 밖에 없었기에 초기 중국의 불교는 고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박트리아와 소그드 인들이 꽃피웠던 불교문화 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찬란했던 불교문화는거의 찾아볼 수 없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산천을 보면 거대한 산도 광대한 평야도 없지만, 평지보다는 산이 많다. 그러나 크게 위협적인 산은 별로 없다. 산이 많은 만큼 산과 산이 만나는 곳에는 빗물에 패여서 골골마다 계곡도 많다.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그런 곳에 적당한 비가 내려 산천을 이루고 있으니 한국은 어디 한군데도 그냥 버릴 곳이 없다. 그만큼 사람살기 좋은 좋은 곳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산야는 어디인들 명당이 아닌 곳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 중에서 보다 더 좋은 곳을 찾아 명당에 터를 잡고 살고 싶어하고, 또 그런 곳에 수행처를 만들어 수행하고 기도하면 보다 수도가 잘되고 도를 깨치기가 좋을 것으로 믿기에 그런 곳을 찾아 많은 수행사찰들이 들어섰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절이 들어선 곳은 그 어디를 가보나, 그야말로 산천과 잘 어우러지고 또 깊고 험한 산골짜기에 있어도 절이 들어선 곳만은 아늑한 기도처로서 기가 뻗히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 깊은 산속이 아니면서도 수행도량으로 새롭게 들어선 절이 있어 순례해 보았다. 그곳은 서울 중심에서 50km 이내에 자리 잡은 곳으로 한국에서는 명당이 가장 많다는 용인에 있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포항 호미곶은 우리나라 육지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해맞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육지에서 가장 동쪽으로돌출한 호미곶은 말 그대로 .호랑이 꼬리처럼 생긴 돌출한 곶.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가 있는 곳은 가장 동쪽에 있기에 1초라도 더 빨리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며 매년 1월 1일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지만,호미곶이 해맞이만의 명소는 아니다. 호미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시설들을 해 두었는데, 이곳이 옛날에는 고래잡이를 많이 했던 역사적 사실을 연상하도록 작은 동산을 만들어 고래등을 연상하게도 하였고, 서기2000년을 맞이하면서는 둥근 해를 형상화하여 둥글게 테를두른 새천년기념관을 세워서 포항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 찾는 이들에게 설명하는 자료들을 모아놓기도 하였다. 이 새천년기념관은 그 해를 닮은 형상이 나름 아름다운 모습으로 호미곶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기념사진의 한 장면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또 광장의 왼쪽 한편에는 매년 1월 1일이면 커다란 가마솥에 떡국을 끓여서 새해 첫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떡국 한그릇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포항은 한국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종합제철소를 갖춘 철의 도시이다. 이런 이유로 포항하면 가장 먼저 제철소가 생각나고 제철소하면 수도 없이 솟아있는 용광로의 뜨거운 불길과 그 불길에서 뿜어져 나오는하얀 연기가 우선 눈에 띌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곧 한국의 모든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제철소에서 쏫아져 나오는 굴뚝과 연기가 공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본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먼 공해의 도시라는 선입견을 갖게도 하였다. 이러한 포항은 제철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또한 자연환경이 좋아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최근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생활폐수가 흘러 죽은 하천 이었던 '동빈내항'까지의 하천을 정비하고 복원하여운하를 개통하였고 그 운하로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보트들이 드나들고 있고, 또 호미곶 외곽으로 길게 감싸고 있는 해안선에는 바닷가가 온통 절벽으로 접근조차 하기 어렵던 곳에 해안둘레길을 만들고 있다. 그 해안둘레길이 다 만들어지면수십 km에 이를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 전체는 개통이 되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포항의 외곽지역인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는 유서깊은 고찰이 있다. 그 창건연대는 서기 600년 대이니 1400년이 넘는 고찰이다. 고석사의 창건 설화에 따르면 고석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동쪽에서 서광이 비치는데 그 빛이 3일씩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선덕여왕이 그 빛의 출처를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그 근원을 찾고보니 그곳은 바로 현재의 고석사에있는바위에서 발한 빛이었다고 한다. 이에 선덕여왕은 점을 잘치는 태사관을 시켜 점을 치니, 태사관은 이 신비한 빛이 나오는곳에는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절을 짓는 것이 나라발전에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었다. 선덕여왕은그 의견을 중하게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이한 이야기가 전하는 고석사에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조성한 석불이 있는데, 이 석불이 선덕여왕때 조성된 석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기이하고 신비스러웠다. 이 석불이 모셔진 전각은 보광전이라고 부르는데, 보광전은 고석사의 주불전으로 부처님만이 홀로 모셔져있고, 좌우에는 보처보살이 없었다. 또보광전의 좌우측 벽면에는 탱화가 있는데좌측에 지장보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