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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박물관에서 본 익산 미륵사 옛모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익산 미륵사지에는 텅 빈 미륵사지에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겨우 서있는 모습의 서쪽 석탑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탄압받다보니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된 모습으로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목탑과 금당을 비롯한 모든 목조건축물은 자취도 없이 사리지고, 비바람 불에도 강한 석탑마져도 기울기 시작하여, 동쪽에 있던 석탑은 탑을 모든 석재가 주변에 널부러지고 수 백년동안 흙먼지가 불어와 덮여서 그 위에서 주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그런 뒤 조선이 망한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와서 보니, 미륵신앙의 성지였던 이곳은 방치된 미륵사터에는 무너져 내리는 서쪽의 석탑만이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데 석탑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물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였을 것인데,  그 흩어진 모습을 보니, 탑에 불사리를 모시는 곳은 석탑의 가장 높은 부분인 상륜부 근처였기에 저 미륵사지 서쪽에 쓰러져가는 석탑에는 사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무너져 내려 누군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서 고정시켜놓은 모습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때 일본인들이 시멘트로 고정하지 않았더라면 미륵사지 서쪽 석탑은 이나마도 훨씬 더 무너져 내려 그 형상이 더욱 더 처참해졌을 것이다. 아니, 일본인들이 혹시 하는 마음에 불사리를 찾는다며 석탑의 맨 아래까지 무너뜨렸더라면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그 모습마져도 전하는 바가 없이 사라질 뻔 하기도 하였다.

 

백제시대 서기 600년대 초기 백제무왕은 그의 왕비와 함께 사자사로 가는 도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 이르자 갑자기 물가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 왕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미륵삼존불에 경의를 표했다.  이에 미륵삼존을 본 왕비는 무왕에게 이곳는 미륵불이 출현할 성스러운 곳이니 이곳에 절을 세워줄 것을 간청하였고, 무왕은 그 뜻에 따라 당시 고승이었던 지명법사의 조언을 듣고  당시 세계 최대사찰인 미륵사를 세우게 되었다.

 

당시 세계관에 따르면 동 아시아는 전체가 불교신앙으로 통일 되어 있었고, 각 나라마다 각각의 불국토을 이룩하여 국론통일과 태평성세를 갈구하였다. 따라서 어느 나라가  더 훌륭한 불국토를 이루느냐에 하늘의 운이 어디로 갈 것인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여, 나라마다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지었다. 그런데 큰 절을 짓는 다는 것은 말처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큰 절을 지을 수 있는 훌륭한 기술이 있어야 되고, 또 어마어마한 국가재정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당시 백제의 인구는 불과 3백만명이 될까 말까한 시절이었으니, 이런 어마어마한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국가재정의 반 이상을 바쳐서 적어도 10년이 넘게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런 대역사를 600년 초기 백제 무왕은 무난히 완성하였고, 이를 본 신라는 백제 미륵사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또 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백제의 장인들을 불러다 신라 한복판에 황룡사를 짓고 중심에 9층목탑을 세웠다. 그야말로 백제와 신라에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찰이 서게 되었다. 백제의 미륵사가 3개의 가람을 하나의 대지위에 세운 것이라면, 신라 황룡사는 한개의 가람안에 3개의 금당을 지어서 약간 다른 모습의 불국토가 세워졌다.

 

백제 미륵사에는 3개의 가람을 배치하되, 가운데 가람을 더욱 크게 짓고, 좌우에는 작은 가람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가운데 중원가람에는 9층의 목탑을 높게 세우고, 좌우에는 높이는 낮지만 그 목탑의 구조와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9층 석탑을 지어서 안정감 있는 미륵사를 건축하였다. 그렇게 세운 미륵사의 건축양식은 추정컨데 백제인이 당시에 일본에 지어주었던 법륭사의 건축양식과 같았을 것으로 보고 현재 법륭사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추정복원도를 그리고 이를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 것이 미륵사지박물관에 전시중인 백제 미륵사의 복원모형도이다.

 

그런데 왜 백제는 그리도 미륵신앙에 몰두 했던 것일까? 불경인 미륵경전(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본래 인도에서 석가모니불의 제자였는데 석가모니불 당시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설법하기를 미륵은 이세상에서 인연을 다하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보살로 이제는 저세상 도솔천의 보살로 환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솔천에서 중생교화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도솔천에서의 생이 다하면 미륵은 후세에 이땅에 미륵불로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세상에 다시 올 미륵불은 이 세상에서 3번의 설법을 통하여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할 것이라고 설법을 하였다. 이것이 미륵신앙에 나타난  미륵보살과 미륵불을 숭상하는 연유이며, 백제가 미륵사 창건의 목적이다.  즉 이땅에 미륵신앙의 본찰인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후세에 이세상에 올 것이라는 미륵불이 바로 백제의 땅에 나타나 주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진정 불국토가 되는 것이며, 이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 같이 구제될 것이라는 것이다. 

 

백제지역에는 특히나 미륵신앙과 관계되는 절들이 많다. 현재 근처 논산  관촉사, 개태사, 김제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충주 미륵사. 고창 선운사, 화순 운주사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미륵불과 보살이 조성되었다. 미륵은 인도에서 열반에 든 뒤 도솔천에서는 보살로 환생하여 도솔천의 대중들을 교화하고 있다고 하며, 그 현재의 모습으로는 빙긋이 웃고 있는 반가사유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세상에 올 때에는 부처로 오기 때문에 서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런 이유로 보살로도 부처로도 표현되는 미륵은 이세상에 올 구세주로, 세상이 살기 어렵고 전쟁이 닥쳐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보살이요 부처였다.

 

옛 백제시대 미륵신앙의 본찰 익산 미륵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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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