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에는 요선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과, 그 옆에 무릉리마애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차츰차츰 낮아지는 산지이지만 평야지역까지는 매우 멀고 먼 굽은 산길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에서 가까운 동쪽지역은 첩첩산중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첩첩산중, 사람이 살것 같지 않고 신선들이 살것 같은 곳인지라 마애불이 있는 이곳은 예부터 무릉도원으로 불려왔고 근래 이곳은 아예 행정구역명을 무릉도원면(2016.11.14, 수주면'水周面'에서 무릉도원면으로 변경) 으로 바꾸었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영월의 천년고찰 법흥사에서 가까운 곳이다. 1400여년 전부터 불국토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온 자장율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법흥사는 한국 불교의 계율의 수행정신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간직한 성지로 이름 나있는 절이다. 마애불은 강가 언덕 위에 크고 평탄한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자연석이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올라 앉아 있는데 여기에 마애미륵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의 형상은 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보물 제87호와 제84호로 지정된 강릉시 범일로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좌상이다. 강릉 신복사는 고려시대 신복사 절터다. 신복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불교관련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 창건역사 및 폐사에 대하여는 그 내력을 알수가 없다. 다만 1933년 발간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 때 명주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810~889)가 굴산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시대 후기에는 선종이 유행하였는데, 이때 신라땅에는 9개의 선종가문이 있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산선문을 열었던 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 강릉 굴산사에 본거지를 두어 굴산산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개창한 스님은 범일국사였다. 불교사를 돌아보면 경전위주로 성장하던 시대를 교종불교라하며, 이때는 화엄경을 위주로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한편 선종은 방대한 경전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종파인데, 이때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주로 선수행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수행을 위주로 한 종파라 하여 선종이라고 한다. 신복사는 1936년 일제강점기에 절터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편에 쓰여진 글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에 있는 보물 2107호로 지정된 건물 이지당(二止堂)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성공하여 육지에서 첫 승리를 이룩한 의병장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이지당(二止堂)은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 그 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의 끝자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집은 뒤로는 낮은 구릉이 뒤를 받쳐주고 있으며, 건물은 바위를 펑퍼짐하게 다듬은 곳에 세운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앞으로는 금강상류인 서화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서화천 건너편에는 기름진 논밭이 있어, 배산임수로 전형적인 풍수의 명당터에 지어진 서당이다. 이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의 남쪽, 전북의 북쪽을 나누는 산으로 대둔산이 있다. 오랫동안 금산은 전라도였으나, 1970년 초 대둔산의 북쪽에 있으며 충남의 중심인 대전과 가깝다고 하여, 충청도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렇게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지역인 대둔산의 북쪽에 금산의 오래된 고찰로 태고사가 있다. 태고사의 창건은 신라의 삼국통일기 민중들의 삶을 보듬고, 당시 주류를 이루던 화엄사상에 의한 불교학을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스스로 신라땅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태고사의 창건에 대하여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효는 이곳을 발견하고 기쁜 나머지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창건이 맞다면 태고사는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나, 현재의 건물과 불상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그런데 절의 이름이 원효사가 아니고 태고사인 이유는 고려말 선승으로 한국불교계를 이끌던 태고 보우국사의 호에서 연유한다. 태고 보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하여 태고사가 되었는데, 태고사 역사에 따르면, 많은 이적을 보인 진묵대사가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에는 효종때 유학자로 유명한 우암 송시열도 이곳에 올라 '석문'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한계령 대관령의 서쪽은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꽁꽁 얼었으나, 동쪽은 동해안 바닷바람에 그리 추운줄도 몰랐다. 그런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눈에 흠뻑 젖어든 양양 낙산사를 담고자, 새벽 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달려갔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동해안에 많은 눈이 내린다 하여 출발은 하였으나, 홍천을 지나고 인제를 지나서 한계령에 이르기 까지 눈쌓인 모습은 별로 없어서 과연 양양에는 눈이 왔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한계령 고갯마루에 이르고 보니, 약간의 눈이 보였다. 그러나, 그뿐으로 고갯마루에서 쌓인눈 때문에 버스가 달릴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였으며, 오히려 양양에 눈이 이정도 뿐이라면 낙산사의 풍경도 별로 볼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계령을 내려와 양양읍내로 들어서니 온통 하얀세상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새벽잠을 설치고 달려온 것이 몇번째였으나, 이번에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동해안 눈소식이었다. 낙산사 앞에서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길가에도 온통 눈이 쌓여서 자동차길만 겨우 다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곳곳마다 많은 해돋이 절경들이 있지만, 바닷가가 아닌 육지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명소는 손꼽을 정도다. 육지에서 볼 수 있는 일출명소로는 양평 두물머리, 서산 간월암, 태안 안면암, 창녕 우포늪, 임실 옥정호 그리고 옥천 용암사 등이 있다. 다른 명소들은 낮은 평지에서 볼 수 있는데 옥천 용암사는 해발 654m 장령산 봉우리에서 동쪽에 펼쳐진 옥천의 구릉지와 야산들이 안개에 휩싸이는 풍광에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이 일품인 명소로, 미국의 CNN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아름다운 경관 50장면의 하나로 소개될 만큼 평가받은 명소다. 그러나, 오늘 용암사 사진은 일출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일출 시각을 맞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옥천에도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렸다. 옥천 용암사는 충청북도 산간지역인 장령산에 깊이 자리한 사찰로, 절이 산의 8부능선 위에 있는 까닭에 걸어서 오르기는 쉽지 않다. 산길이 포장도로로 잘 닦인 상태에서도 굽이굽이 산길을 꺾어 돌아 귀가 멍멍함을 느끼며, 약 2.0km정도를 올라 용암사 앞에 오르면, 2층으로 만들어진 축대 위에 10여대 주차공간이 나타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사진 길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금산의 고찰인 보석사(寶石寺)는 신라 헌강왕때인 885년 조구스님이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이 보석사인 까닭은 당시 절 앞산에서 금이 많이 나와서 그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절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 모두 불타버려서 알 수가 없고, 폐사가 되었던 절터에 조선말 고종 때 명성황후가 전국의 명소를 찾아서 기도하던 중 이곳에도 시주하여 중창되었다. 당시 이곳은 행정구역상 충남이 아니라 전북으로 전북지역내 33개 사찰을 관할하는 큰절이기도 하였다. 보석사의 현재 모습은 대웅전과 전각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승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아가 승전 기록을 남긴 기허당 영규스님이 수도하였던 절로 유서 깊은 절이다. 정규군이었던 관군들이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영규스님이 이끄는 승군들의 쾌거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곳 보석사에서 수도하던 영규스님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살생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전국토가 유린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에 영규스님은 깨달음과 중생구제의 자비심 실현은 절안에서 수도 참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악마들과 같은 일본군들을 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군인도 아니면서 전쟁에 뛰어든다? 지금 같으면 ‘왜? 군인은 어디가고?’ 라는 질문을 바로 하겠지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는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전쟁터에 대거 뛰어들었다. ‘의병(義兵)’ 들이 바로 그들이다. 일본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조선강토를 유린할 때 미처 전쟁을 준비 못한 조선의 정규군들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섰으나 연전연패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한양(서울) 궁궐에 있던 선조임금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양을 버리고 북쪽 명나라 경계에 있는 의주로 도망치듯 피난을 가버리고 남은 백성들은 삽시간에 들이닥친 왜군의 총칼에 처참하게 죽어갔다. 조선 정규군들의 연전연패 소식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하던 때, 충효(忠孝)를 삶의 목표로 살아오던 선비들은 무자비한 왜군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불살생을 가장 큰 계율로 삼으며 수행 정진하던 승려들 또한 가세했다. 정규군 출신이 아니면서도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 선비들과 승려들이 힘을 모아 왜군과 맞선 결과, 연전연패하던 조선군은 처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되었다. 그 첫 승리는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3달 15일 만
{우리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1353~1419) ‘회고가(懷古歌)’- 며칠전,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는 청풍서원에 다녀왔다. 서원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석비와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2층의 보호각이 시선을 끈다. 백세청풍비는 1761년(영조 37년) 당시 금산군수가 군내의 유림과 후손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세웠다. 백세청풍이란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사당 앞에 세운 비석에 새겨진 글로 <맹자>에서 유래한다. 맹자가 백이를 칭송하면서 쓴 표현이라고 전하는데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선비의 절개를 뜻한다. 동방의 ‘백이숙제’라고 일컬어지는 야은 길재 선생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목은 이색, 포은 정도전과 함께 고려의 충신으로 평가되는 인물로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그의 문학과 관련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재 선생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시를 지어 고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이라고 하면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을 꼽는다. 난계(蘭溪) 박연(朴堧,1378~1458) 선생은 조선시대 국악을 정리한 음악이론의 대가로 충북 영동이 고향이다. 어렸을 때부터 피리를 즐겨 불며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컸지만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과거 공부에 매진, 28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그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출세가도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그의 음악적 역량을 알아본 세종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었던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박연은 관습도감의 제조로 임명되어 악보 편찬에 힘을 쏟았으며 필요한 악기를 만들어 그때까지 제각각이던 악기의 음을 조율하게 된다. 또한 박연은 향악, 당악, 아악을 조사하고 정리하였으며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을 모두 옛 제도에 맞도록 제작하는 등 조선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충북 영동에는 난계국악박물관이 세워져있다. 2000년 9월 전시시설 완공과 함께 개관한 난계국악박물관은 5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