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對馬島本是我國之地]” 이는 서지학자 이종악 선생이 독도 박물관 앞에 세운 빗돌에 있는 내용이다. 일본 시마네 현은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하는데 이에 당시 마산시 의회는 대응차원에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발한 날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정부 관여행사로 지속하지만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관여하지 않으며 대마도 고유 영토설은 소수 의견에 그치고 있다. 대마도의 양속성[兩屬性]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평화 시에는 한돌곶[한반도]과 왜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대마도는 처음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12세기 송(宗) 씨가 아비루가를 평정 하면서 이후 송 씨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왜국에서 대명으로 임명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양쪽에 다 속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생존과 존립을 위해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한돌곶[突
[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2017년은 《백범일지》 발간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나라 최초 덕률풍[전화의 음역] 개통일은 《백범일지》에 근거하여 1896년 10월 2일(음력 8월 26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일지에 ‘전화 친칙[직접 명령]’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는 기록 때문인데 왕조시대 이 사건에 대하여 사실 여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전화 친칙’이 허구이거나 아니면 ‘전보 통보’라는 추정 때문이다. 1897년 12월 14일 독립신문에 ‘궐외[闕外] 전화 가설’ 기록이 새롭게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1898년 1월24일 인천 해관과 궁내부 사이의 전화사용 기록을 최초라고 보아 왔으나 어디까지나 사용 기록이지 개통 기록은 아니다 이로서 일지의 기록과 실제 개통일 사이에는 1년의 차이로 좁혀졌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서 개통일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백범일지》의 전화 친칙[親勅]에 관한 기록 일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 대군주 폐하[陛下]께옵서 대청[집무실]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가지고 ‘김창수(金昌洙, 김구)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親勅」을 받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창수에게 전지(
[우리문화신문=진용옥 교수]1882년 조ㆍ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그 이듬해 음력 4월 7일(양력 5월 13일) 초대 미국 전권공사(全權公使) 푸트(H. Foote)가 인천에 도착하여 13일 조약에 비준(批准)하였다. 1883년 음력 6월에 조선에서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는 답방사를 뜻한다. 이들은 9월 2일 이른 아침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제물포항을 떠난 지 한달 반 만이었다. 9월 18일 오전 11시쯤, 민영익 등 사절단은 뉴욕 5번가 호텔의 대귀빈실에서 아서 백리세천덕[대통령 곧 프레지던트의 음역]를 만나 알현례을 거행했다. 일행은 민영익의 신호에 따라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백리세천덕 [대군주] 알현례[謁見禮] “이런 예[禮]는 임금이나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한다. 그 외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대군주에 올리는 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