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2월 14일 독립신문에 ‘궐외[闕外] 전화 가설’ 기록이 새롭게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1898년 1월24일 인천 해관과 궁내부 사이의 전화사용 기록을 최초라고 보아 왔으나 어디까지나 사용 기록이지 개통 기록은 아니다 이로서 일지의 기록과 실제 개통일 사이에는 1년의 차이로 좁혀졌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서 개통일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백범일지》의 전화 친칙[親勅]에 관한 기록
일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 대군주 폐하[陛下]께옵서 대청[집무실]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가지고 ‘김창수(金昌洙, 김구)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親勅」을 받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창수에게 전지(傳旨)하여 주라’는 분부을 듣고 왔소. 오늘 하루 얼마나 상심하였소? 관청 수속이야 어떻든 나의 요량으로는 이재정[감리]이 그 공문을 받고 법부에 전화로 교섭한 것 같으나, 그 후 대청에서 나오는 소식을 들으면 사형은 형식으로라도 임금에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법인데, 법부대신이 사형수 각인의 공건(供件)을 가지고 조회에 들어가서 상감 앞에 놓고 친람(親監)을 하던 중 입시 승지 중 뉘가 공건을 다시 살필 때 ‘국모보수(國母報讐-원수 갚음)’ 4글자가 눈에 이상히 보여서 재가 수속이 지난 안건을 다시 임금에게 보인즉 대군주가 즉시 어전 회의를 열고 의결한 결과 국제 관계니 아즉 생명이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하였다 한다.’
이어서 최초 전화개통과 관련해 중요한 증언을 전한다.
장도전화[長途電話] 개통
‘장도전화가 인천 까지가 처음이요. 전화 가설 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양력 1896년 10월 2일)) 날이라 한다. 만일 전화 준공이 못 되었어도 사형이 되었겠다 한다.’
장도전화란 시외전화란 뜻이다 너무나 극적인 이야기인지라 감동이 찐하게 전해 온다. 하지만 전화 친칙이 있었던 해가 1896년도라는 기록이외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 없다는 까닭으로 일지의 기록을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1902년도 민간 전화 개통시기를 근거로 백범일지 이야기는 전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과연 그럴까? 먼저 김창수(金昌洙, 당시 20세) 치하포 사건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본다.
김장수와 치하포 사건
① 1896.3.9. 왜인 상인 토전 양량[쓰시다 조스케]을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안악군(安岳郡) 치하포 나루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원수 갚음)를 목적으로 살해
② 1896.4.1(고종실록 34권) '도적 처단 규례'와 '형률 명례’를 재가하여 반포하다. 규례는 강도, 절도, 와주, 준절도 네 가지로 구분하고 형률 명례도 네 가지로 구분한다는 내용이다
③ 1896.5.11(음력 백범일지) 체포되어 해주옥에 수감
④ 1896.7.7(음력. 백범일지) 인천으로 이감
⑤ 1896년 이재정(李在正)이 인천 감리[지방검찰청]와 인천 부윤[시장]으로 겸직 발령
⑥ 1896.9.10 3차 심문(1차 심문-8월 31일, 2차 심문-9월 5일)
⑦ 1896.9.16(독립신문)에 인천감리가 김창수의 살해와 재물탈취 등 죄목으로 조율 처판[調律處辦]하여 달라고 법부에 상신하였고, 1896.10. 2 법부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재차 안건 조속 처리해 달라고 전보로 건의한 결과 법부에서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⑧ 1896.10.23(음력 9월 17일) 법부에서 김창수 등 사형 상주(규장각 도서 1895~96년 김구의 연중 의병활동과 치하포 사건, 도진순)
⑨ 1896.11.7일(독립신문 '잡보'): 인천재판소에서 김창수를 교형에 처하기로 선고하였다고 보도 <백범 일지에서는 “신문이 배포된 후로 감리서가 술렁술렁하고 항내 인사들의 산제문이 옥문에 답지한다.”고 하였다 분위기를 전함>
⑩ 1897.1.22(고종실록 35권) 전국 각 재판소에서 강도 죄인 장명숙 등 35인을 교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김창수는 빠져 있다.
⑪ 1898년 2월 15일자[독립신문 '외방통신]' 인천항 감옥서 죄수 중에 해주 김창수는 나이 이십 세라 일본 사람과 상판 된 일이 있어 갇힌 지가 지금 삼 년[실제는 2년간 임]이다. 옥 속에서 주야로 학문을 열심히 닦으며 또한 다른 죄인들 권면 하여 공부들을 시키는데 그 중에 양봉구의 공부가 탁월하여 그 외 여러 죄인들도 김창수와 양봉구를 본받아 학문 공부를 열심히 한다. 감옥 순검의 말이 인천 감옥서는 옥이 아니요 인천 감리서학교라고 들 하며, 인천항 경무관 총순은 죄수들을 특별히 예로 대접하여 학문을 힘쓰게 하는데 그 바람직함을 우리는 깊이 치사 하노라' 라고 보도되고 있다.
위의 과정에서 살펴보듯 절차에 따라 35명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은 내려졌으나 어떤 영문인지 김창수는 집행 되지 않고 이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있다 정지 명령을 받았는지 누락시켰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로부터 2년간 살아 있었으며 감리서 내에서 교화 활동을 하며 복역하고 있었다.
1898년 3월 9일(백범일지) 마침내 주위의 도움으로 백범은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화개통에 관한 상황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
초창기 전화 이용과 개통
① 상운과 전화기의 도래
1882년 3월말께 상운이 청국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덕률풍[텔레폰 음역] 2대를 가지고 왔으나 실험일 뿐 개통되지는 않았다. 이는 전신보다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이다
② 1893년 덕률풍 도입 기록 통기 38권-1893년 11월27일조]
궁내부에서 전화를 가설하기 위하여 전화기를 도입하고 면세토록 지시했다 이는 4년 후 명성황후 인산시에 문상 ‘전어기’로 쓰였을 것이다 [동방예악 사상과 전화 문상 참조}
③ 궁내부 전화기의 궐외 가설 [1897년 12월 14일자 독립신문]
‘궁내부에서 농상공부에 공문을 보내어 전화기 8대를 새로 설치할 계획으로 농상공부 소속 주사 1명, 일등학도 5명, 공장 5명이 각 장비를 갖고 오라 하였더니 농상공부에서 공문을 보내 답변하기를 전보 학도는 기술이 부족하고 공장은 남로 전선 가설하는데 보내어 공두 1명만 있을 뿐만 아니라 시설 장비도 부족하여 본부기사 김철영씨와 한성 전보사 주사 3명에게 공두 1명 인솔하여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각 마을에다 전화기 8대의 설치를 마치었다.’는 내용이다. 서울 각 마을이 어디인지는 소상히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북촌과 남촌 서촌의 관아 일 것이다 한성보다 서울이란 말이 쓰였다는 점이 이채롭다
④ 최초사용기록 [외무아문일기 1898년 1월 24일]
인천감리서 주사 조광희가 덕률풍으로 전해 오기를 영국군함 5척, 러시아군함 1척, 미국군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는데, 육지로 상륙하였던 영국 병사가 금일 오전 10시에 승선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는 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최초 전화가설 시기로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통 기록이 아니라 사용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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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전화 개통과 백범일지
이상에서 전화의 개통이나 이용사례 등을 검토하였다. 1897년 12월 14일 궁내부[덕수궁]를 벗어나 궐외 각사까지 전화 가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만 인천까지 연장사용의 명확한 기록은 아니다. 사형 언도는 분명한데 사면 또는 감형과 형 정지등에 대한 친칙은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형이 언도된 뒤에도 2년간 집행이 보류된 체 옥살이가 진행된 것으로 보아 집행 명령이 전달되지 않거나 유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을 표로 정리하였다.
새롭게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전화 개통 시기는 1897년 12월 14일이다. 1896년 10월 2일과 얼마 차이가 안 나는데 다만 또다시 전화 가설 기록들이 새롭게 발굴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따라서 전화 친칙이 허구라거나 전화보다는 전보가 합리적이라는 반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불어 한 위대한 독립투사의 명운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로 목숨을 건져 낸 자랑스러운 사례로 보아야만 한다. 전화 문상과 더불어 세계 통신 발달사에서도 그 유례를 잦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사연이다. 세계인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새로운 자료 발굴에 힘쓴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었으며 도움을 준 통신사료 수집가 이 봉재 씨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