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시대 우리 남자들은 여성을 평생 집안에 가두어 두었다. 공자님, 주자님을 끌어들여 여성을 속박하는 데에 잘도 써먹었다. 위선적인 도학군자들의 죄가 가장 무겁다. 지금 여성들에게 남자들이 꼼짝 못 하고 눌려 사는 것은 어쩜 인과응보인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관광 명승지나 고급 식당, 멋진 카페, 일류 백화점을 들여다보면 거의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도대체 이 시각 남정네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당구나 탁구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사업장이나 사무실에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까?” 어찌하여 우리 남아 대장부들의 처지가 이처럼 꽁지 빠진 수탉, 혹은 서리맞은 약병아리 행색이 되고 말았는가. 탄식이 나오다가도, 그래 이게 다 우리가 수수 백 년 쌓아 올린 업보 아니겠는가, 달게 받자. 마음을 달래곤 한다.
지난번에 여성 김삿갓 김금원이 14살 때 남장하고 집을 나가 제천의 의림지를 구경하는 모습을 우리는 들여다 보았다. 김금원의 의림지 여행기는 그녀의 기행문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의 한 부분이다. 제목이 난해하다. 호 (湖: 제천의 호수). 동(東: 동쪽의 금강산), 낙(洛: 서울 용산)을 이어 엮은 것이란다. 조선 시대 여성들이 남긴 여행기 중에서도 <호동서낙기>는 그 여행의 내력이 희한하고 내용과 문장이 모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생기가 넘쳐 흐르고 맑은소리가 난다고도 한다. 한문으로 쓰인 점이 아쉽다.
시기 순으로 조선 여성의 기행문을 정리해 본다.
연안 이씨(1737~1815)의 <부여노정기>
은진 송씨(1803~1860)의 <금행일기>
의유당 남씨(1727~1823)의 <의유당 관북유람일기>
김금원(1817~?)의 <호동서낙기>
강릉 김씨의 <서유록>
 
김금원에 대하여 못다 한 이야기를 약간 하련다. 1830년 봄 남장을 하고 집문을 벗어나 제천 의림지를 방문한 이야기는 이미 하였다. 집 나갈 때의 기분이 “새장에 갇혀 있던 매가 새장을 나와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천리마가 재갈을 벗어 던지고 천 리를 내닫는 것” 같은 해방감이었다는 말도 이미 인용하였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주 출신의 금원은 금앵(錦鶯, 비단 꾀꼬리?)이라는 이름의 관기 생활을 하는 동안 시를 잘 쓰는 기녀로 이름이 알려졌다. 의주에서 벼슬살이한 적이 있는 김덕희의 소실이 된 뒤에는 서울 용산 삼호정에서 시회를 주도한다. 금원은 경전과 역사서에 밝았다. 아마 어렸을 때 병약한 데다 총명하여 부모가 집안일 대신 글을 가르쳤던 것 같다.
그녀의 여행기 <호동서낙기>는 사실 세월이 하 많이 흐른 뒤 서른네 살이 되던 1850년에 펴낸 것이다. 그러니까 소녀 시절부터 유람 다녔던 추억을 가슴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중년이 되어 펴낸 것이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서울로 돌아와서 용산 삼호정에서 여성 시인들과 시회를 열고 지낸 일도 기록하고 있다.
금원의 일생에서 남장하고 돌아다녔을 때가 가장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여행을 다 끝낸 뒤 그녀는 남장을 벗고 결국 유교 감옥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는 애써 이렇게 말한다.
“오랜 소원이었던 여행을 두루 했으니 이제 그만하고 본분으로 돌아가자.”그녀가 미처 다하지 못한 여행과 말을 오늘날 여성들이 유감없이 하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