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떤 노래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여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간 만나고 헤어져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은 변했을 법한 긴 세월에, 정확하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작 두 번 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면서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니 말이다. 내가 소학교 5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이였다. 학교 갔다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맛있는 먹거리를 가득 사 오신 것이었다. 사탕과자는 물론, 명절에나 겨우 먹을 수 있던 고기며 바나나랑 떡이랑,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이름 모를 과일들... 내가 눈이 휘둥그래서 어리둥절해 있었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이 래일 우리집에 작은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예상했던 대로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였는데 그날 우리집은 마을에서 큰 경사라도 치르는 집 같았다. 편벽한 시골 탄광마을에 살던 우리는 그때만 해도 마을에서 자동차라고는 가끔씩 석탄과 모래를 싣고 오가는 해방패(자동차 상표) 외에는 구경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너 왼손잡이야?" "얘 왜 왼손 쓰지? 바보야?" "바른손을 쓰지 못할까?" 남들과 다르다는 사회의 소수자라는 특수성분 때문에 어릴 적에는 다양한 핀잔과 눈총을 받아 왼손잡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왼손으로 밥 먹으면 혼나고 글씨도 반드시 오른손으로 써야 했다. 내가 직립보행을 하고 수저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해서부터 부모님은 왼손부터 뻗는 나의 "못된"버릇을 고쳐주려고 왼손에 양말을 씌우고 붕대로 감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모님의 극성스러운 "훈육"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전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린 나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포기를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요즘은 그래도 우뇌의 지배를 받는 왼손을 개발하자는 호성도 높아가고 있지만 내가 소학교 다니던 그 당시만 해도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틀리고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주임의 "특별관심대상"이 되었고 팔자에도 없는 나머지 공부를 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어린마음에 몇 번이나 훌쩍거렸는지 모른다. 그때 억지로 교정이 돼서 지금 글은 오른손으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바른 말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요즘 애들은 인터넷의 나쁜 영향을 받았는지 비속어가 아주 가관이다. 그리고 일부 위쳇동아리에서 곱게 말해도 돌아오는 건 “벌칙”이다. 시대에 따라 속담도 달라진다고 했던가?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험하다.”라고 하는 말도 있단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편하면 되지 남의 심정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다는 거다. 자기가 스트레스 받아서 상관없는 사람한테 화풀이하면 당한 사람은 무슨 죄인가? 애들이 순진하지 못한 비속어를 입에다 달고 다니니 참 한심하다. 우리 조카도 어디서 한어비속어를 배웠는지 툭하면 비속어를 쓴다. 나로서 들어주기엔 단어가 너무 거북하다. 애들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거라 비속어를 쓰지 말라고 하면 더 할 건데 어떻게 말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물론 나도 고칠 것이다. 나도 이제부터라도 조카애랑 동생에게 존댓말과 바른말을 배우게 도와줘야겠다. 조카한테도, 동생한테도 존댓말과 바른말을 써봐야지. 어떤 반응이 나오고 어떤 효과가 생길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봤더니 정말 효과가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올해 아흔네 살 되는 우리 엄마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나는 내 앞가림을 착실히 했다.”라는 말씀이다. 흐뭇한 어조로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홍조가 어린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허리는 꼬불었지만 착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자존심은 꼿꼿하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엄마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게 되자 시골에 사는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당시 아버지에게는 여섯 살 되는 딸, 네 살 되는 아들, 그리고 년로한 부모님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십오 년 년상이지만 유식하고 시비 바른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좋았다고 한다. 결혼 뒤 엄마는 일 년 만에 나를 낳았고 몇 년 뒤에는 동생까지 낳았다. 큰집살림인지라 만만치 않았지만 재롱을 떠는 우리가 있어서 행복했단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엄마와 의논했더니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첫돌도 안 되는 동생을 업고 서둘러 이사했다. 이사한 뒤 아버지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집주변에 심은 채소밭이나 가꾸고 간혹 돼지죽이나 한두 번 주면 그뿐이었다. 엄마는 유일한 로동력이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말 한마디가 천냥무게”, 제목을 달고 보니 기쁨 반 슬픔 반, 야릇한 웃음이 입가로 스쳐 지난다. 그래도 내 맘은 ‘행복한 웃음인데’라고 알려준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고 감격스러웠다. 벌써 13년 세월이 흘렀다. 젊은 나이에 유방암진단을 받고 집안사정으로 지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주치의사랑 저녁식사를 마친 남편이 휘청거리며 집에 들어서더니 나를 흘깃 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순간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의사선생님이 뭔 말씀했길래 저럴까? 설마…... 나는 다짜고짜 남편을 침실로 잡아끌었다. “당신 왜 울어요?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당신이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난 누구한테 의지해야 돼요?” 그러자 입이 천근무게인 남편이 나를 꼭 안아주며 “동무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소.” 라고 하면서 슬프게 우는 것이었다. 맙소사. 내가 뭔 일을 저질렀지 나 때문에 많은 사람 울리고 가슴 아프게 하고 진짜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맘 한구석으로 난류가 흐르고 감격의 물결이 이는 것을 어쩌랴. 맨날 무뚝뚝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돼지”라고 나무람만 했는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친엄마 아니에요?" 딸애는 종종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짐짓 정색해서 되묻는다. "응? 어떻게 알았지? 내가 고아원에 가서 나 닮은 애를 데려다 입양한 줄을." 그러면 딸애는 이렇게 대꾸한다. "거짓말, 그럼 사람들이 왜 나를 엄마 꼭 빼 닮았다 해? 난 엄마 친딸이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나이 삼십이 다 되어 딸애를 본 우리는 애가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쥐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애 아빠도 나도 다 애한테만 사랑을 쏟고 애가 없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아기에게 엄청 집착하였다. 뒤늦은 아이의 탄생은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쾌락을 안겨주어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중시절 한 숙사에서 가깝게 보내던 동창생이 상해에서 연길로 출장 왔던 길에 아기도 볼겸 그 동안 헤어져 살았던 회포도 풀겸 겸사겸사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어가게 되었다. 친구는 자기가 먼저 애를 키워보았노라고 애 키우는데 천방지축인 나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어주면서 이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나는 전 씨 가문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들만을 선호하던 그 세월에 둘째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엄마는 은근히 바라셨다. 점쟁이도 찾아가고 심지어 첩약까지 잡수셨는데 내가 또 딸로 태어나서 얼마나 락심하고 눈물 흘리셨는지 모른단다. 엄마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뒷집 경식이 엄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떡판 같은 아들을 덜컥 낳았다. 경호를 낳았을 때 그 집은 경사난 집처럼 흥성흥성했고 나를 낳았을 때 우리집은 초상난 집처럼 스산했다니 억울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엄마는 나를 낳고 3년 만에 또 녀자아이를 낳았다. 셋째까지 딸을 낳고 엄마는 눈물을 휘뿌리며 아들 없는 설움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경호네는 경호 아래로 또 남자아이를 낳아서 경호엄마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딸타령을 하셨고 그때마다 엄마는 입만 다시며 어색하게 웃으셨다. 아들 못 낳은 우리 엄마를 위안하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린 나도 엄마를 비웃는 것 같아 경호엄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말귀를 알아들어서부터 아들타령을 못 박히게 들어온 나인지라 어떻게 하나 아들 있는 집 못지않게 부모를 기쁘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키에 얌전하게 생겼지만 애교가 전혀 없고 곰처럼 둔하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살아온 내가 어떻게 "어머니 학교"에서 유일하게 남편의 편지를 받아냈는지? 몇 년 전, 나는 친구의 소개로 "어머니 학교"를 다녔다. 첫날 특강을 듣고 분조토론을 가졌고 마지막에 숙제를 냈다. 이튿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분조별로 숙제를 점검하고 대표를 뽑아 발표하게 했다. 첫날 숙제는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두 번째 날에는 남편한테 편지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날에는 남편이 사랑스러운 리유, 자식이 사랑스러운 리유를 써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숙제는 자기절로(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다른 어머니들도 숙제를 아주 잘해왔다. 그런데 네 번째 날 숙제는 남편한테서 안해에게 쓴 편지를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해야 하는 숙제였다. 모두들 그 숙제는 어렵다고 의견을 제기했다. 많은 어머니들이 도리질 하면서 완성할 수 없다고 난색을 하였다. (저 어머니들은 왜 저러지? 왜 남편한테 말도 해 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시려 하지?) 시어머님 말씀을 빈다면 나의 남편은 "각시 말 잘 듣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엄마”라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은 같은 말이면서 다른 말이다. 우리집에서도 그렇고 어릴때 우리가 살던 시골 고향마을에서도 그렇고 “엄마”라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말이였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게 된것은 순전히 우리 어머니에서 비롯된 것이다. 며칠전, 시조카의 결혼잔치에 갔다가 딸애가 수탉모양의 옛날식 색과자를 얻어왔다. 하지만 돌처럼 땅땅한 색과자를 그대로 먹을수 없어서 봉투채로 나한테 맡겼다. 그래서 어릴때 우리 어머니가 하시던대로 시루를 놓고 쪘는데 솥에서 피여오르는 향긋한 과자향기에서 나는 어른거리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어머니는 보통 키에 항상 깡굴깡굴* 짧은 파마머리를 하셨는데 갸름한 얼굴에 눈매며 콧마루며 입매가 부드러웠다. 아무리 힘든 농사일을 하셔도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실 때에는 늘쌍 방그레 웃으셨다. 어머니는 우리 오남매들이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언성을 높여 꾸짖거나 탓하지 않고 몇 마디로 너그럽게 넘어가주셨다. 그러나 우리들의 불손한 언행에 대해서는 항상 조곤조곤 타일러주셨다.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집에서 새는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동지섯달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면 어린 학생들이 엄마손을 잡고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본다. 털목도리, 털장갑, 따뜻한 신발로 전신무장한 애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나는 넋 없이 이런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우리 집은 오빠와 언니 둘 그리고 남동생과 녀동생에 나까지 모두 여섯남매였다. 어머니는 장기환자였고 아버지의 한분의 노동력으로 꾸려가자 보니 매우 가난하였다. 어릴 때 나는 언니들이 물려주는 옷을 기워 입었고 새옷은 언제 입어봤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70년대의 겨울은 어찌나 추웠던지… 소학교는 마을에서 5 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입김에 눈썹이 어느새 할아버지 눈썹으로 되고 살을 에는 추위에 입이 얼어 말도 더듬거리게 된다. 또한 불어치는 눈보라를 피하려고 뒷걸음치며 걷다가 넘어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귀가 얼어서 벌겋게 부어나니 어머니가 눈밭에서 가지대를 가져다 끓여서 그 물로 씻어줄 때도 있었다. 소학교 3학년 때, 우리반 담임선생님으로 김련숙 선생님이 오셨다. 항상 웃음 띤 얼굴에 인자한 모습인 선생님을우리들은 모두 좋아했다. 선생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