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봄이 오는 길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넘어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오늘은 김기웅 작사ㆍ작곡, 박인희 노래의 <봄이 오는 길>이다. 박인희는 1970년에 혼성듀엣(박인희, 이필원) '뚜아에 무아'로 데뷔하여 ‘약속’, ‘세월이 가면’ 따위로 알려졌다. 그녀는 1972년 독립하여 홀로(솔로)가수가 되었는데, ‘모닥불’, ‘방랑자’, ‘하얀조가비’,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봄이 오는 길’ 따위가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박인희의 노래는 소녀의 감성을 노래하듯 순수하고 맑고 고운데 한 편의 시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감성적이다. 이 노래를 작사한 김기웅은 노랫말을 한 편의 시를 쓰듯이 우리말로 아름답게 써 내려갔다. 맨 먼저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라고 속삭인다. 지금이야 시골 어디에 가도 아스팔트 쭉쭉 뻗은 큰길만 보이지만 정말 봄내음, 고향 냄새가 나는 길이야말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菠薐傳數名(파릉전수명) 시금치는 여러 이름이 전해지는데 其始出波羅(기시출파라) 그 시작은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네 我國有俗稱(아국유속칭) 우리나라에도 부르던 이름이 있었는데 恐是赤根訛(공시적근와) 아마 ‘적근’이 그것인 듯싶네“ 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한시(漢詩) <파릉(菠薐, 시금치 ‘파’, 시금치 ‘릉’)>이다. ‘시금치’는 페르시아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페르시아를 한자 음역한 ‘파라(波羅)’를 따 파사채, 파사초, 파채(菠菜)라고도 했으며, 조선에서는 뿌리가 붉어 “적근채(赤根菜)”라고도 불렀다. 시금치는 페르시아지방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김창협의 한시로 우리는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그 이전 1577년(선조 10)에 최세진(崔世珍)이 한자 공부를 위해 펴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처음 시금치가 등장하고 있어서 조선 초기에 들어와 재배된 것으로 여겨진다. 김창협은 당대 명문 출신으로 동부승지ㆍ대사성ㆍ대사간을 지냈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죽자 벼슬을 버리고 숨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람의 밥이 되어 - 허홍구 오늘 왔다가 오늘 가는 하루살이의 생명도 위대하게 왔으리 길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나무 이파리도 신비롭게 왔다가 가느니 내 작은 한 톨의 쌀로 몸 받아 올 때 하늘과 땅이 있어야 했고 밤낮이 있어야 했고 해와 달 비바람이 있어야 했다 농부의 얼굴을 뙤약볕에 그을리게 했고 애간장을 녹이게 했고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일하게 하고 땀 흘리게 했다 이제 사람의 밥이 되어 나를 바치오니 작은 이 몸이 어떻게 온 것인지를 일깨워 부디 함부로 하지 말게 하소서 24절기 ‘춘분(春分)’이 얼마 전이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다. 지금이야 대부분 사람이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다. 그 흔적으로 남은 것이 “점심(點心)”인데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간식을 말하는 것이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한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 끼가 고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이는 단가의 하나인 ‘사철가’의 부분이다. 단가는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다. 단가는 ‘사철가’ 말고도 ‘진국명산’을 비롯하여 ‘장부한(丈夫恨)’ㆍ‘만고강산(萬古江山)’ㆍ‘호남가(湖南歌)’ㆍ‘죽장망혜(竹杖芒鞋)’ㆍ‘고고천변(皐皐天邊)’ 따위로 50여 종이 넘지만, 오늘날 10여 종이 불릴 뿐이다. ‘사철가’에서는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라고 소리한다. 그러면서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라고 하면서 꽃이 핀 봄을 놓아버린다. 이제 낼모레면 춘분(春分)이고 진달래, 산수유 등 꽃이 피어 드디어 춘색(春色)이 완연한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공주를 대신하여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곧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노래했다. 그녀는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自然衣帶緩) 가느다란 허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乍晴乍雨)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도리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정이야 譽我便應還毁我(예아편응환훼아)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곧 다시 나를 헐뜯고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이름을 피하는가 하면 도리어 이름을 구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은 상관하지 않으며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부쟁) 구름 가고 구름 옴을 산은 다투지 않도다 寄語世上須記憶(기어세상수기억) 세상에 말하노니 모름지기 기억하라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어디서나 즐겨함은 평생 이득이 되느니라 김시습은 이 한시에서 “누군가가 나를 치켜세우는가 했더니 어느새 나를 헐뜯고 있고, 명성을 피한다고 하더니 어느덧 명성을 구하곤 한다. 하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은 상관하지 않고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은 다투지 않는다.”라고 깨우쳐주고 있다. 그러니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건 즐거운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평생의 득이 될 것이라고 속삭여준다. 매월당(梅月堂)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를 보았다 - 김상현 죽도록 일만 하는 당신 분노를 사랑으로 되새김질 한 당신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당신 일상도 경이롭게 바라보는 당신 누추한 곳에서 평안을 취하는 당신 언제나 자기 걸음으로 걷는 당신 모두가 잠든 사이 혼자 우는 당신 무거운 짐을 마다하지 않는 당신 멍에까지도 운명으로 사랑하는 당신 죽어 가죽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당신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요즘에는 한우(韓牛)라 하면 한국에서 기르는 소로 육우(肉牛) 곧 주로 고기를 얻으려고 기르는 소를 말하지만, 원래는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우리 겨레와 함께 살아온 ‘일소’였다. 그 한우를 우리는 먼저 황우(黃牛, 누렁소)로 떠올리는데, 1399년 권중화, 한상경, 조준 등이 쓴 수의학책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보면 누렁소에 더하여 검정소(흑우), 흰소(백우), 칡소 등 다양한 품종이 있었다. 칡소란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배기 황소를 말한다. 조선 중기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 곧 영모도(翎毛圖)를 잘 그렸던 화가 퇴촌(退村) 김식(金埴)의 그림 가운데는 어미소와 젖을 빠는 송아지의 모습을 그린 소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허물을 벗는다 - 이창년 허물을 벗는다 매미도 벗고 뱀도 벗고 우리도 벗는다. 허물을 벗으면 달라지는 게 있지 그렇게 우리도 달라지겠지 초승달이 보름달 되듯 보름달이 그믐달 되듯 어제가 오늘과 다르듯이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고 그러나 묵은 세월이 주저앉은 너와 나는 별반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야 엄청 달라졌지 그동안 측은지심이 많이도 자라서 키를 재고 있는걸. 허물을 벗지 않는 파충류는 파멸한다고. 한다. 허물을 벗는 동안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애벌레가 어른벌레가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허물벗기는 파충류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얘기다.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인데 낡은 사고를 버리지 않고 숨을 쉬고 있다면 그건 화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야 깨닫지 못한 채겠지만... 그래서 나이 먹은 이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렸다. 물론 사람 모두가 최첨단을 향해 허물을 벗으려고 발버둥을 칠 필요는 없다. 하루 먹기 바쁜 일반 대중이 목숨 걸고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허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동경 발간다래 / 새도록 노니다가 / 드러 내 자리랄 보니 / 가라리 네히로섀라 / 아으 둘흔 내 해어니와 / 둘흔 뉘 해어니오” 이는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나오는 것으로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處容歌)>다. 설화에서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러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으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능 소 화 - 황인동 나는 당신이 걱정이고 당신은 내가 걱정이고 걱정은 또 모든 게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담을 넘는다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란 뜻이 담긴 능소화(凌霄花), 여름꽃이다. 그 많던 봄꽃이 다 지고 잠시 쉬는 사이 수줍은 주황빛 옷을 입고 흐드러지게 핀다. 다만, 능소화는 활짝 피어 이틀 정도 지나면 통꽃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그 기개가 독야청청하는 양반을 닮았다고 해서 '양반화'라고도 불린다. 능소화에는 하룻밤 성은(聖恩)을 입었던 궁녀 ‘소화’ 이야기가 전한다. 성은을 입었지만, 임금에겐 끝내 잊힌 슬픈 궁녀 소화. 그녀는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지쳐 죽었고, 그 소화가 환생해 피웠다는 꽃이 능소화다. 그러기에 담장 너머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능소화는 그렇게나마 오늘도 높은 담장을 넘어서고 있는가? 고즈넉한 시골집 돌담이나 회색빛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담처럼 담장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10m까지도 담쟁이덩굴처럼 올라가 담장 너머 세상을 보려는 능소화. 황인동 시인은 <능소화>라는 시에서 “나는 당신이 걱정이고 / 당신은 내가 걱정이고 / 걱정은 또 / 모든 게 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심정이 되어 - 이 윤 옥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당당히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가운데 줄임)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중근아.” 배달겨레의 철천지원수 이등박문을 쏴 죽인 우리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장군. 그런데 우리의 영웅 안중근 뒤에는 안중근보다 더 당당한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본명 조성녀, 미상 ~ 1927.7.15)가 있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길 원하지 아니한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결코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죽음을 앞둔 옥중의 아들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 조마리아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는 1926년 조직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上海在留同胞政府經濟後援會) 위원을 지냈다. 또한, 같은 해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ㆍ조상섭 등과 함께 정위원(正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함으로써 안중근의 어머니로서뿐만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