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비석 형태로 다듬은 돌에 불상과 상을 조성한 기록을 새긴 불비상(佛碑像)은 중국에서 북위시 때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습니다. 특히 불비상에 새겨진 글자는 조성 시기와 발원(發願)한 사람, 조성 당시의 역사·사상적 배경까지 알 수 있어 학술 값어치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그 예가 매우 드문데,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7구(軀)의 불비상이 동일 지역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은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몸체[비신부(碑身部)]ㆍ받침돌[대석(臺石)]ㆍ지붕돌[옥개석(屋蓋石)]이 잘 남아있어 비상 형식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제 유민들이 발원하여 만든 불비상 1960년과 1961년에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옛 연기군] 서광암(瑞光庵), 비암사(碑巖寺), 연화사(蓮花寺)와 인근 지역인 공주시 정안면에서 모두 7구의 비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불비상들은 모두 흑회색 납석(蠟石) 계통의 돌을 사용하였고 조각 기법과 양식도 같아 같은 조각가 집단에 의해 제작됐을 것으로 봅니다. 이 가운데 4구의 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글씨가 새겨져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성벽 속에서 나온 두 점의 자루솥 자루솥(초두-鐎斗)은 고대에 만든 세 개의 다리와 긴 손잡이가 달린 금속 냄비입니다. 세 다리 사이에 불을 피워 술이나 차 또는 약을 끓였다고 합니다. 자루솥은 주로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지만 드물게 자기로 된 것도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처음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1925년 한반도 전역에 7월부터 9월까지 큰비가 내렸습니다. 이때 한강도 넘쳐서 많은 논밭과 민가가 불어난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특히 동부 이촌동ㆍ뚝섬ㆍ송파ㆍ잠실리ㆍ신천리ㆍ풍납리 등 한강과 가깝거나 낮은 지대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 ‘을축년 대홍수’라고 부릅니다. 이 재해로 수많은 사상자와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이르는 약 1억 300만 원의 피해액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홍수로 허물어진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의 옛 성벽(오늘날의 서울 풍납토성) 속에서 큰 항아리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그 항아리에는 청동 거울과 두 점의 청동 자루솥이 들어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유리건판 가운데 당시 큰물이 지나간 뒤에 찍은 성벽과 항아리 사진이 있습니다. 자루솥이 출토된 성벽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조선 후기 문화를 꽃피웠던 인물입니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임금이지만 실제 그가 남긴 여러 자취를 통해 볼 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치밀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신하에게 비밀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들이 수신자의 집안에 대대로 보존되어 지금까지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들은 용의주도하게 정국을 운영해 가는 개혁군주 정조의 모습과 고뇌하는 정조의 인간적인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자료입니다.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 홍낙임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정조 임금 편지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정조의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정조신한-正祖宸翰 첩과 두루마리 30건)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첩입니다. 보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758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쌍탑이 김천 갈항사(葛項寺)의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와 그녀의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아 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탑을 세우 뒤 27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오부인은 황태후가 되었고 그 이후 발원자였던 세 사람은 탑에 기록되었습니다.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모습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존 신라와 백제로 대표되던 각기 다른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7세기 말 무렵, 경주의 감은사(感恩寺)와 고선사(高仙寺)에 세워진 삼층석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탑들은 마치 통일 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듯, 안정적이면서도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입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하였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보 <청자 참외모양 병>은 고려청자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병입니다. 제17대 임금인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황통육년(皇統六年)'(1146)이라는 정확한 연대가 있는 시책과 함께 전해져 고려왕실의 청자에 대한 심미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비색을 대표하는 병 여덟 잎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주둥이(구연)와 긴 목, 여성의 치마 주름처럼 생긴 높은 굽다리, 농익은 참외 형태로 만든 병의 몸통이 유려하면서도 우아합니다. 참외 모양의 몸통은 상하 수직선으로 눌러 오목하게 골을 표현하였고, 각각의 곡면에는 팽팽한 양감이 드러나 있습니다. 높직한 굽의 예리한 직선과 몸통의 곡선이 대치를 보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 긴장감과 함께 경쾌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줍니다. 몸통을 중심으로 목과 굽다리의 연결부위에서 확인되는 돌대는 금속기에서 빌린 듯하며, 병목에 가로선이 세줄 오목새김(음각)되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오직 형태와 유색으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굽바닥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 받침을 일곱 곳에 받쳐서 구운 흔적이 있습니다. 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보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문화재입니다. 1924년 발굴될 때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지금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의 사랑을 받습니다. 주인과 하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각각 말을 탄 모습으로, 말 탄 사람의 옷과 각종 말갖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신라인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어떻게 발굴했을까?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金鈴塚)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30일이었습니다. 금령총은 6세기 초,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의 신라 무덤입니다. 금령총 주변에는 신라의 초대형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금령총의 북쪽에 약 15m 떨어져서 단일 무덤으로는 신라의 가장 큰 무덤인 봉황대가 있고, 서쪽에는 금관총, 서봉총, 남쪽에는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습니다. 금관이 처음으로 발견된 금관총은 금령총과 불과 50여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1920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었을 때 당시 언론은 ‘동양의 투탄카멘’이라고 특필하였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금관총은 집을 짓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리는 ‘몸’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입니다. 인도에서는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로 다양한 전각과 탑을 지어 부처를 모셨으며, 사리장엄구를 만들어 부처께 올리고 탑에 봉안했습니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 일컬을 만큼 석탑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석탑이 대다수지만,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도 일부 확인되는데,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이 그 예입니다. 이 탑은 전탑이라는 특징 말고도 독특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전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석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려면 석탑 부재의 한 부분을 파서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벽돌을 쌓아 만드는 전탑은 석탑과 달리 별도 공간을 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의 사리장엄구를 어떻게 탑 안에 모셨을까요?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2층 탑신 부분에서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사리장엄구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사리장엄구는 건물 형태의 금동제 사리기 안에 녹색 유리잔이, 그 안에 다시 녹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아래 《실록》) 가운데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시기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사실을 연월로 기술하는 편찬 방법)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1624년(인조 2)부터 편찬이 시작되었고, 1633년(인조 11) 중초본(中草本)’ 1부가, 이듬해 5월에 중초본을 검토하고 옮겨 쓴 정초본(正草本) 2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태백산 사고(경북 봉화)에, 정초본 2부는 정족산 사고(강화도)와 적상산 사고(전북 무주)에 1부씩 봉안(奉安)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해군일기》는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1책(권55-58)으로, 1612년(광해군 4) 7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의 기록을 담았습니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전란의 수습에 힘썼으며,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했습니다. 광해군은 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은 1797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였습니다. 금강산 풍경을 유탄(柳炭, 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데 쓰는,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숯)으로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2년 뒤인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6달에 걸쳐 가을 금강산(풍악산) 그림첩인 《해산첩(海山帖)》을 완성했습니다. 지리학자 집안 후손인 정수영은 남다른 관찰력, 독자적인 시각과 경물 배치 방식, 특유의 필법이 특징인 자신만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금강산의 가을을 담은 정수영의 《해산첩》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현대인들은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이를 블로그 등의 개인 누리집에 올려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장소라도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 시각 경험에 따라 촬영 대상이 달라지고, 같은 대상을 찍어도 사진기의 종류, 촬영 각도, 촬영자의 기술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생산됨을 깨닫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가을 여행의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워서 ‘풍악산(楓嶽山)’이란 별명이 있는 금강산을 찾은 문인들은 자신이 본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노상풍정(路上風情), 장터길, 빨래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1745~ ?)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속 스물다섯 점의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보자면, 그림의 소재는 농업, 상업, 어업 등 일상에서의 노동부터 노동 뒤의 휴식, 서민들의 놀이와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생활까지, 그 주인공은 젖먹이 아기부터 노인까지, 서민부터 양반까지입니다. 그려진 소재와 대상이 다채롭고 생생하여 조선시대의 한 때, 어떤 곳에 다녀온 기분인데,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하나의 화첩에 모아 그린 예는 풍속화가 유행했던 조선 후기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스케치풍의 그림 :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 가로, 세로 30여 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