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한국음악무용예술단>이 L.A와 그 이웃 지역에도 전속 예술단체가 되어 그동안 3,000개 이상의 학교에서 5,000회 이상의 방문 공연하였다는 이야기와 학교의 선생님들이 ‘경이로운(wonderful)’, ‘최고로 멋진(awesome)’, ‘아름다운(beautiful)’, ‘매혹적인 (mesmerized)’, ‘최고로 즐거운(really enjoyed)’ 등으로 평가해 줄 때, 김동석 교수는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L.A 음악센터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음악무용예술단>이 어떻게 그토록 긴 시간을 학교방문 교육에 동참해 올 수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 본다. 김동석의 학교방문 공연수업은 한국의 역사 이야기로 시작해서 국악기 연주와 무용 등을 선보인 다음, 한국말 몇 마디 가르쳐 주는 것으로 진행한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한 동양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시간이려니 해서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됨에 따라 학생들의 반응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원더풀’을 연호하며, 공연이 끝나면 사인을 해달라고 줄을 서기 시작한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김동석 교수가 L.A지역의 어느 중학교에서 실행한 다인종 문화의 이해를 위한 공연 수업을 소개하였다. 음악센터에는 약 60여 개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나, 창립 이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는 김동석의 <한국음악무용예술단>이라는 이야기, 음악센터의 광장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는 항상 동 예술단의 공연 장면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김동석의 <한국음악무용예술단>은 창단 다음 해인 1984년부터 이웃 지역, 곧 오렌지 카운티와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county), 산디에고(San Diego)의 전속 예술단체가 되었다. 이들 지역을 합하면 남북한을 합친 길이보다 더 길다고 하는데, 대략 3,000개 이상의 학교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김동석 교수의 말이다. “어떤 날은 새벽 4시에 떠나 3시간 운전해서 학교에 도착, 공연하고, 또 어떤 날은 2~3개 도시를 돌면서 한국을 모르고 있는 어린 학생들을 만나는 기쁨에 피곤을 잊고 뛰어다녔지요. 아마도 지난해 2019년까지 우리는 5,000회 이상의 방문 공연을 했을 겁니다. 이 강의를 하면서 음악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김동석 교수가 창단한 <한국음악무용예술단(Korean Classical Music and Dance Company)>이 L.A 지역의 다문화 이해 프로그램에 참가, 초 중등학교에서 한국음악과 춤에 관한 강의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처럼 작게 보이는 노력들이 모이고 쌓여, 미국민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문화의 강국”임을 심어 온 것이라 하겠다. 글쓴이가 김동석 교수를 만났을 때, 그는 어느 중학교 공연 수업에 나를 초대해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 그는 <Korea>의 spelling을 알고 있는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질문한다. 약 1/3 정도가 손을 든다. 이어서 한국은 어느 대륙에 위치하고, 인구수, 수도를 소개한 다음, 간단하게 역사와 한국인들이 즐기는 전통음악과 무용을 소개했다. 한국의 전통악기들, 예를 들어 장고를 소개한다면, 실제의 장고를 들어 올려 생긴 모양새를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오른손으로는 장고채를 잡는 법과, 치는 형태, 왼손으로 북편을 울리는 시범을 보이며 소리빛깔의 차이를 느끼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나면 무용수가 직접 장고를 메고 나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매주 화요일, 독자들을 만나 온 <서한범의 한국음악이야기>가 지난주로 500회를 맞게 되었다. 두서없는 이야기였음에도 독자들로부터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는 “한국정부의 지원 약속, 지켜지지 않아 실망”이라는 제목의 <한국민속보존단체>의 탄생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미국 연방 정부로부터의 운영자급을 받아 10여 명, 다음 해에는 20여 명의 생활비가 지급되었다는 이야기, 동 단체는 각급 학교를 방문,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 한국의 역사,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의 실연, 때로는 지역의 불우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도 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미 공화당의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이 직업훈련 프로그램은 끝나게 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1980년 3월,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단원들은 대대적으로 환영 연주를 하였다는 이야기, 대통령을 수행하던 당시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과 상의해서 매년 30만 달러의 기금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김동석 교수가 <한국음악무용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매주 화요일, 독자들을 만나 온 국악속풀이가 이번 주로 500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신한국문화신문>이란 이름의 인터넷 신문을 발간하고 있던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윤옥 시인, 이무성 화백 등, 3인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국악 듣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는 점”, “국악감상이나 이해에 가까이 접근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점”, “그들을 위해 쉽게 안내하는 글을 신문에 써 주었으면 한다는 점” 등을 청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요청이 매우 현실적이며 진지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나는 몸담고 있던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여 다소 시간 여유는 있게 되었던 차였고, 이러한 기회에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 독자들과 만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주 1회, A4 2장에 국악 관련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작업은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이야기, 또는 발표 공연이나 연주회, 학술모임, 등등, 국악 행사와 관련하여 보고 느낀 점 등을 중심으로 적어보기로 한 것이다. 지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미국은 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사회이어서 각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키워 감으로써 미국문화의 다양성이 미국의 국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간다는 이야기, 미국악원 정기연주회에는 이동엽 외 13명이 궁중악무와 민속악무를 발표하였는데, 윌셔이벨 극장 1,200석 좌석이 교포와 외국인들로 만석이어서 이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한국인 민속보존단체의 탄생 이야기를 소개한다. 1977년 1월의 일이다. 미주의 국악인들이 어떻게 하면 전공분야를 살려가며 미국에서 생활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 오던 김동석은 고민 끝에 로스앤젤레스시 커미셔너로 있던 이천용 씨를 통해서 당시 지역사회의 유색인종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있는 CCDS(Community Care Development Service)의 회장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한국민속보존단체>-(Korean-American Ethnic Heritage Group)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직업 보장 프로그램의 하나인 CETA 기금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이 CCDS는 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70년대 초, L.A에 <재미국악원>이 발족하여 3.1절이나, 광복절 등 국가적 행사, 교포사회의 문화 행사, 그리고 <연꽃축제>와 같은 아시아인의 행사 등에 초청되어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체적인 정기연주회는 미루어 오다가 궁중과 민속의 악무 10여 종목을 준비해서 <창립기념연주회>를 갖게 되었는데, 부래들리 L.A 시장의 축하 인사와 정부가 파견하는 문화 사절도 오기 어려운 시기에, <재미국악원>의 역할이나 이에 대한 기대가 높아간다는 총영사의 격려사도 소개하였다. 그렇다. <재미국악원>의 정기 연주회가 있던 1976년 당시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또한, 70년대는 외국을 여행한다는 그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국악학교를 졸업한 젊은 국악인들이 미국 L.A에 모여 살게 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미국 문화의 일부로 키워가려는 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은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사회다. 그래서 각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키워 감으로써 미국문화의 다양성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김동석과 파사디나 시(市)에서 열리는 <장미꽃 축제>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이 축제는 전 세계에 TV 중계가 될 정도로 유명한 행사였고, 그의 참여가 축제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이 컸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규모가 큰 행사일수록 연습량이 비례하는 법인데, 그 힘든 길거리 행진을 잘하기 위해서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점,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전통문화, 한국인의 정신을 지켜가려는 충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젊은 국악인 10여 명은 1973년 5월, <재미국악원>을 발족시켰으며 그해 9월 23일에는 <창립기념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남가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1만 명 수준이었고, 특히 예술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때였다. 대표적인 예술인 단체를 꼽는다면 남가주 <음악가 협회>,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안에 <음대 동창회>, 그리고 <미술가 협회> 등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새롭게 <재미국악원>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Don Kim, 김동석 교수가 상쇠로 코리안 퍼레이드를 이끌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L.A의 명물 <코리안 퍼레이드>는 1974년부터 현재까지 45년을 이어 오고 있는데, 그 중심에 풍물패가 있고, 김동석이 꽹과리를 치며 지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하나 1975년 말, 헐리웃 은막의 거리에서도 30만 인파의 환호 속에 크리스마스 시즌의 막을 올리는 행사가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을 때에도 그 주인공은 우리 풍물패였다는 이야기, 아마도 이민 역사상, 미 주류 사회에 소개된 첫 퍼레이드가 아닐까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1984년은 미국 LA올림픽이 개최되어 이와 관련된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4년 뒤에는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어서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내에 김동석이 이끄는 한국의 무용단이나 음악단, 풍물패 등이 알려져서 위상에 걸맞은 문화의 강국답게, 한국을 상징하는 전통음악과 춤이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L.A 올림픽이 개최되는 기간 내에 소수민족 예술단체 가운데서는 김동석이 이끄는 단체가 공식적으로 공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Don Kim, 김동석 교수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리틀엔젤스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1971년 6월,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유학 초기의 어려웠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치과기공학교를 들어가 기술을 배웠고, 사업을 하면서 C.S. University에서 종족음악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 1970년대 초, L.A 지역의 국악인 10여 명이 <재미국악원>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창단 기념식과 연주회를 했는데, 한국의 ‘수제천(壽齊天)’을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연주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당시 L.A 지역신문에도 미국 내에 처음으로 한국 전통국악의 연구 보급을 맡은 <재미국악원>이 정식 발족 됐다는 소식과 함께, 앞으로 국악강습회와 실연, 방송을 통한 국악 보급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는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남가주 교포사회의 다양한 행사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공식 행사도 국악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또한 미 주류사회의 여러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조직에 실무를 담당하게 된 사람이 바로 김동석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