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향임이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오정숙 명창의 영향으로 소리꾼의 길을 결심한 뒤 선생 댁에 기거하면서 소리만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였고, 무형문화재 판소리 이수자(履修者)가 되었으나 실기와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서 「놀부 제비노정기 비교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녀의 학위 논문, 「놀부 제비노정기 비교연구」는 박녹주-박송이로 이어지는 소리제와 김연수-오정숙의 소리제를 악보화 하여, 장단별, 단락별 구성음과, 종지음, 꺽는 음 등을 살펴서 선법(旋法)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장단 형태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리듬형의 종류나 횟수 조사에 머물지 않고, 대마디 대장단 이라든가, 잉어걸이, 당겨 붙임, 완자걸이나 교대죽 등의 전통적 판소리 리듬꼴을 분석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이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판소리 <흥보가>는 가난하고 착한 동생, 흥보가 날기 공부하다가 떨어진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 주고,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가운데 강남에 갔던 제비가 박씨를 물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향임(高香任) 여류명창이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8시간 30분 동안,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때로는 슬픈 소리로, 때로는 재미있는 아니리와 발림으로 청중을 쥐락펴락했다는 이야기, 판소리 공연의 일반적 형태는 어느 한 대목을 토막소리로 부르는 것이었으나, 1968년도에 고 박동진 명창이 처음 완창을 시도한 이래, 이러한 형태가 정착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지난해 12월, 대전시 예능보유자 고향임 명창은 동초제 춘향가를 완창하여 객석을 메운 청중들로부터 열띤 환호를 받았다. 고 명창은 소리꾼이 되는 과정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녀의 말이다. “저는 1957년(64살) 군산에서 태어났어요. 군산은 최난수 명창이나, 김수연 명창 등 국내 최정상급 판소리 명창을 배출해 낸 고장이지요. 또한, 내일의 명창이 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젊은 소리꾼들이 적지 않은 전통 예술의 고장입니다. 저는 여고시절, 시(詩)를 좋아했고, 또한 누구 못지않게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배우 지망의 학생이었지요. 여고를 졸업한 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 연극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배우의 꿈을 키우다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기,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판소리 중고제(中古制)와 이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가문의 이야기를 하였다.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에서 심팔록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교적 늦은 나이에 악인(樂人)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이해조의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 그의 구술로 신문에 연재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는 서울 구파극의 중심이었던 서울 장안사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이 무렵 예단(藝壇) 일백인(一百人) 편에는 심정순에 관하여“그는 여러 광대 중에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해서 집안이나 밖에서 열심 근면하고, 한 개의 흠절을 잡을 곳이 없다.”라는 내용이 실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대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동초제 춘향가의 예능보유자, 고향임(高香任) 여류명창이 장장 8시간 30분 동안,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하면서 청중을 울리고 웃긴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해 12월, 10일이었다. 국악의 중심, 서울 서초구에 있는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서는 고향임 명창의 완창 소리판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충남 서산 출신의 소리꾼 심정순(沈正淳)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심팔록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부친의 음악적 영향을 받고 자랐다는 점, 박춘재 등과 일본에서 음반 취입 후, 발매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해조의 강상연(江上蓮), 연(燕)의 각(脚), 토(兎)의 간(肝), 등이 심정순의 구술(口述)로 매일신보에 연재되면서 더욱 알려졌다는 점, 예단(藝壇) 일백인(一百人) 편에는 여러 광대 가운데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고, 1910~1920년대 그의 활동내용은 대부분이 판소리, 가야금 연주, 병창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비단 중고제 판소리뿐이 아니다. 동편제, 서편제를 막론하고 초창기를 지나 그 이후로 내려오면서 사설의 내용이나 음악적 기교의 변화로 판소리는 세련, 정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근거는 양반층을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인데, 그것은 유성기판에 담겨있는 고음반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물론 음반 자체가 여러 제약 속에서 그렇게 기획되기도 하였지만, 시골 장터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열린 공간에서 쉽게 접했던 욕설이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속음악의 명인으로, 즉흥음악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던 심상건과 그의 딸 심태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한 바 있고, 1965년에는 심상건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었며, 그의 묘비에는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는 이야기, 심상건의 숙부, 심정순의 소리제는 그의 막내딸 심화영에게 이어졌는데, 이 소리는 과거 서울 경기지방과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제(古制)의 한 유형이며 김창룡 가문과 이동백, 심정순을 위시한 심씨 가문 등에서 이어졌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심정순으로부터 중고제 소리를 이어받은 심화영은 소리보다는 춤에 더 재능을 보여서인가, 특히 승무(僧舞)를 잘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승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이 된 바 있고, 그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현재 이 종목은 심화영의 손녀딸 이애리가 전수조교로 활동하며 동 종목을 보존하고 있다. 심화영의 승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중고제 판소리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을 소개해 보도록 한다. 심정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심상건 명인의 넷째 딸, 심태진이 현재 99살의 노인임에도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가야금산조와 병창, 단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지도방법은 1:1 개인지도로 매우 엄격하였으며 제대로 못 하면 대나무로 어깨를 맞았다는 이야기,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산조는 즉흥적이어서 오르지 한성준이 그 장단을 맞출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심상건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속음악, 특히 가야금산조와 병창, 기악의 명인으로 무대나 방송, 음반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러나 주권을 잃었던 불행의 시대를 보낸 국악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변화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즉흥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산조를 탈 때마다 매번 달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리켜 선생 없이 자학(自學), 자득했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심상건은 해방 직후, 조택원 무용단의 일원으로 넷째 딸, 심태진과 함께 미국의 원정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귀국해서도 그의 공연활동이나 방송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중고제와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중고제 판소리는 경드름이나 설렁제의 가락이 많으며, 평탄한 선율과 장단변화에 따른 극(劇)적인 표현보다는 단조로운 구성이 특징인데, 이러한 판소리 중고제의 특징이 심상건 가야금 산조에도 나타나는 것은 숙부인 심정순의 중고제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주에 이어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와 중고제 판소리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현재, 심상건 류 가야금 산조를 연주할 수 있는 40대 이상의 중견연주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충남 도청이나 문화재단, 서산문화원 등에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 감상회>를 기획하여 지역민들에게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 까닭은 서산 출신 심씨 일가의 활동이나 중고제의 이해 및 재발견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서산>이라는 지역이 배출해 낸 심상건 명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게 되며, 음악적 자긍심을 느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중고제 판소리의 특징을 이어받은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는 남도제의 산조 음악과 또 다른 음악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전승의 가치는 충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심상건의 충청제 산조와 김창조 계열의 남도제(南道制) 산조의 서로 다른 특징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남도제 산조란 19세기 말, 가야금 연주자인 전라도 영암의 김창조가 처음으로 만들어 탄 산조로 우조-평조-계면의 진행이지만, 충청제는 평조-우조-계면조라는 점을 말했다. 또한, 충청제 산조는 평조와 경드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경드름이란 서울ㆍ경기지방의 음악 어법으로 경기ㆍ충청지역을 기반으로 해 온 중고제 판소리의 특성이 심상건의 산조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 심상건의 산조음악은 남도제 산조의 계면처럼 슬픔의 느낌이 깊지 않다는 점, 또한 순차적 하행 선율형과 빠른 장단의 한배, 등이 남도제 산조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밖에도 심상건의 충청제 산조와 김창조계열의 남도제 산조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상건 산조의 음악적 특징』이란 김효선의 논문을 보면, 어느 음계의 중심음이 옥타브 위, 또는 아래로 자유롭게 이동함으로 해서 음역이 확대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선율의 진행은 순차적 하행이 주(主)를 이루고 있으나, 끝냄의 형태는 대부분이 4도 상행 종지라고 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내포지방의 기악으로 대표되는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를 소개하였다. 심상건은 1894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 아버지(심정순)댁에서 자라며 국악적 소양을 키웠고, 그의 4촌 동생들도 악가무로 이름있는 심재덕, 심매향, 심화영 등이며 특히 심화영의 승무는 충남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심상건은 1920~30년대 일제강점기에 강태홍, 한성기, 정남희, 안기옥, 김병호 등과 활동하였고, 약 40여 장의 음반자료를 남겼다는 이야기, 1960년대 말, 5·16 민족상, 전국음악경연대회 가야금 부문의 지정곡은 심상건류 산조였기에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한슬릭(Aduard Hanslick)의 ‘긴장과 이완’이나 심상건의 줄을 ‘풀고 조이는’ 음악 미학(美學)은 같은 의미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도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散調)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심상건류 가야금산조를 분석해 본 연구자들이나, 실제로 그 산조를 연주해 오고 있는 전공자들은 그 산조의 특징이 김창조 계열의 남도제(南道制) 산조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김창조 계열의 남도제 산조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충청지방의 기악(器樂) 중 대전지방의 줄풍류 이야기를 하였다. 줄풍류란 방중악(房中樂), 곧 실내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가곡반주나 영산회상과 같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점, 문화재연구소의 《대전 향제 줄풍류 조사보고서》를 참고해 보면, 1960년대 당시 줄풍류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풍류객은 대금을 연주하는 권영세(1915년 생)로 그는 박흥태, 방호준, 김명진, 성낙준, 윤종선, 김태문 등에게 여러 악기를 배웠다는 점을 얘기했다. 그는 1965년, 대전율회와 <대전정악원>에서 실제적인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당시의 풍류객으로는 권영세 이외에도 7~8인이 있었다는 점, 충청풍류, 곧 내포풍류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대전 율계가 있었으나, 거의 유명무실해 졌다가 1960년부터 대전 현지의 권영세나 임윤수 등에 의해 활동이 재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대전지방의 민간풍류에 이어 이번 주에는 내포지방의 기악으로 가야금 산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충청지방의 가야금 산조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심상건이라는 명인부터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 만큼 그는 당대 가야금 산조 음악으로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심